'親日명단'은 내게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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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과 우리들 앞에 나타날 미래의 목적들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험난한 역사를 지내온 우리에겐 미래와 대화할 과거의 사건과 교훈들이 풍부하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데 익숙하다. 아마도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쥐고 있는 현재의 우리가 역사를 소홀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 명단'을 놓고 계속 바람이 분다. 해방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21세기로 넘어왔지만 아직까지도 일제시대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마무리를 못한 형편이다. 잊고 싶고, 없었으면 좋았을 과거임에는 틀림없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나라에서 이미 오래된 과거지사를 다시 들먹여 어쩌자는 거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일은 사가(史家)에게 맡기고 이제는 미래에 전념할 때가 됐다고 한다. 강위석(姜偉錫) 월간 에머지 편집인은 얼마 전 바로 이 '시평'에서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는 정치적 퇴행성 강박관념은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남의 역사 교과서에는 그처럼 분노했던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을 밝히자는 활동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어수선하고 갈 길이 바쁘다고 하는 것도 늘 해오던 얘기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다, 따지지 말고 덮고 가자, 그래 본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보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시끄럽고 골치 아픈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이제는 우리 사회의 당연한 습관처럼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난제(難題)들은 허다하게 쌓여가고 있다. 그때그때 풀어야 할 매듭을 풀지 않고 미루다 보니 오히려 매듭은 더욱 엉켰고, 그럴수록 사회적 갈등은 더욱 넓게 퍼지고 또 깊어져 갔다.

여기에서 이번 일의 성격과 실체를 실질적으로 따져보자. 이번 일의 성격은 비단 친일(親日) 행적에 국한되지 않는다.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고비마다 과거 청산은 중요한 과제였다. 그 때마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에 의한 정리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는 한, 아무리 망각의 세월이 흘러도 과거의 상처가 결코 치유되거나 잊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친일 행적은 아직까지 그런 정리 작업이 미진한 역사의 숙제임에 틀림없다. 정녕 일제시대의 흔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우리는 이번 기회에 오히려 얼룩진 현대사의 진실에 정직하게 다가서는 지혜를 보여야 한다.

이번 일의 실체는 무엇인가. 친일 인사를 찾아내 단죄하고 매장하는 것은 목적이 될 수 없다. 어떻게 단죄하겠는가. 사람들은 앞으로도 미당(未堂)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읊조리고, 홍난파(洪蘭坡)의 '고향의 봄'을 합창할 것이다. 진정으로 이번 움직임에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자신들이 존경하고 칭송했던 사람들의 친일 행적, 그것도 먼 옛날이 아니고 선명한 기록까지 남아 있는 가까운 과거의 행적에 대해 그토록 무지(無知)할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원인을 따져보고 재발을 막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실체 역시 친일 행적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20세기 후반 독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숱한 진실의 은폐와 사실의 왜곡 앞에 스스로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닫고 있다. '수지 金' 사건이나 의문사의 진상들은 앞으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친일 명단' 문제는 일부 당사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역사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본질적 문제다. 이번 일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상처와 오해로 갈등이 증폭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성급한 봉합을 선호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여러 달, 여러 해가 걸리더라도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는 모든 사실과 견해와 입장을 누구나 진지하게 공개적으로 나누고 대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역사를 존중하고 나아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진정한 역사 의식을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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