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가 남조선입네까" : 탈북자 기내 동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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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8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출발한 서울행 대한항공 KE622편 기내 비즈니스석.

탈북자 이성(43·함북 청진)씨는 여객기가 이륙하자 기쁨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1998년 8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뒤 꼭 3년7개월 만에 한국에 가게 됐지만 고향에 남겨둔 부모와 아들·딸 남매가 끝내 마음에 걸렸다. 곁에는 부인 김명옥(39)씨와 막내딸 진화(7)양이 그런 이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낯선 중국땅을 전전하며 겪었던 이씨의 마음 고생, 몸고생이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주름살로 남아 있었다.

"이제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디요.통일이 돼 봐야겠디요." 이씨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유세계를 만나게 돼 기쁘기 한량없다"며 "가슴이 너무 뛰어 아무 말도 못하겠다"고 입을 닫았다.

3백76석 규모인 보잉777기에서 이들은 맨앞 비즈니스석 26석 중 25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나 이씨의 옆줄에 앉아있던 열다섯살의 북한 소녀 유진옥양은 케이크를 먹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유동혁(48·치과의사)씨는 탈북과 체포→송환→재탈북의 고통스런 탈출과정을 겪었다.

유씨는 "70대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는데 나이가 많아 함께 못왔다"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씨는 오랜 도피생활로 위와 간이 모두 좋지 않다고 한다. 유씨는 자신의 탈북 동기를 "식량난보다 자유가 그리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케이크에 이어 불고기와 샐러드 등 기내식을 "맛있다"며 남김없이 비웠다. 10대들은 앞좌석에 설치된 TV모니터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인천 상공이 가까워지자 분위기는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마닐라를 출발한 지 3시간20분 만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제 정말로 왔다"며 탄성을 질렀다. 눈물을 글썽였던 진옥양도 창밖을 쳐다보며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한국이다" "이게 남조선입네까" "저기가 서울입네까"등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표정에선 25개의 꿈과 기대감이 흘렀다.

이성씨는 "치과 기술을 배웠고 사진도 배웠으니 한국에서 새로 출발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열다섯살의 이대성 군은 "축구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가장(家長)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25명 중 최고령인 최병섭(52)씨는 "얘들을 좋은 곳에서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해 5년 가량 떠돌았던 최씨에겐 자녀들이 가장 큰 걱정거리고,한국행을 죽기살기로 결행하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두명의 소녀 고아가 끼어있었다. 김향(15)·이선애(16)양은 기내에서 수많은 질문을 받고도 시종 고개를 내저었다. 아픈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너무 짧은 시간에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한항공 기내에서=이양수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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