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팩스 시대 연 개성 상인 : 故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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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7일 새벽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우상기(禹相琦)신도리코 회장은 한국 사무자동화의 선구자이자 산 증인이었다.

신도리코의 공채 1기 출신인 이성근(李聖根·61)전 신도사무기 사장은 "직원들이 출출해질 무렵인 오후 4시쯤이면 고인은 손수 군고구마를 한 가마니씩 사 들고와 기술 개발에 열중하는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격려하곤 했다"며 애도했다.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난 禹회장은 동양화학 이회림 명예회장 등과 함께 대표적 개성상인으로 꼽혔다.

고인이 60년 직원 19명으로 설립한 신도교역은 40여년 만에 복사기 시장의 52%, 팩시밀리 시장의 36%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 사무기기 업체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사기는 禹회장이 61년 일본 리코사로부터 들여온 '디아조 습식 복사기'다. 당시의 복사기는 유리판 위에 원고를 놓고 복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감광지 위에 원고를 얹어 수은등이 들어있는 실린더 사이를 하나 하나 통과시키는 투광식이었다. 책을 복사할 수도 없었고, 원고 뒷면이 백지여야 했다.

이 복사기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복사기가 전시된 서울 미도파백화점 3층은 구경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호적초본 등 민원서류를 한번 떼려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야 했던 관공서를 중심으로 복사기 시장의 규모는 급속도로 커졌다.

수입 복사기로 사무자동화기기 사업을 시작한 신도교역은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64년 최초의 국산 복사기 '리카피 555'를 만드는 등 성장을 거듭했다. 70년 일본 리코와 합자하면서 사명을 신도리코로 바꾸었지만 기술 국산화에 대한 禹회장의 열의는 뜨거웠다. 기술연구소에 전체 직원의 20%를 둘 정도 였다. 69년 반사식 복사기를 국내 처음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73년에는 전자계산기를, 75년엔 보통용지식 복사기를, 81년에는 팩시밀리를 역시 국내선 처음으로 개발했다. 최근엔 복사기 기술의 본고장인 일본에 2억5천만달러어치의 복사기 수출계약을 체결했다.

고인은 62년 서울의 13개 구청에 민원업무용 복사기를 납품할 때 손수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날랐다. 회사 설립 이후 42년간 계속된 사실상의 무차입 경영은 외환위기 때 증권가와 다른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장남인 우석형(禹石亨)신도리코 사장은 "자식들에게 경영 수업을 시키면서도 늘 교만하지 말고 근검절약할 것을 당부하셨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이익의 사회 환원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틈만 나면 '3·3·3·1'원칙을 강조했다. 회사 이익을 재투자·주주배당·종업원에게 30%씩 쓰고, 나머지 10%는 공익사업에 쓴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도리코 장학회 등 공익재단 네개를 운영했다. 석탑산업훈장과 새마을훈장·한국의 경영자상·금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최순영(76)여사와 석형·자형(子亨·신도투자 사장)씨 등 2남1녀. 빈소는 서울중앙병원이며,발인은 21일 오전. 02-3010-2270.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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