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강'을 건너는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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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벗 K에게

어김없이, 또 봄이 왔구나. 신생(新生)과 소생(蘇生)의 계절. 그러나 3년 전부터였던가. 너에게 봄은 상실의 상처가 도지는 철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허망함과 참담함으로 범벅된 네 표정 뒤로 하얀 목련꽃이 떨리듯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일찍 차로 치매 전문치료 요양원에 할머니를 모셔다주고 온 너는 종일 넋을 못 추린 듯 보였어. 젖먹이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너는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채워주지 못한 정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했지.

장성해서도 할머니와 한 집에서 생활한 너는, 막 식사를 마치고도 왜 밥 안 주고 괄시하느냐고 떼를 쓰고, 분비물을 처리하지 못해 기저귀를 차야 하고, 소리없이 훌쩍 사라졌다가 지나던 이웃의 손에 이끌려 멍하니 돌아오는 할머니의 퇴행적인 모습을 견딜 수 없어 했지.

결국 의사의 권유로 요양원에 입원시킬 수밖에 없었던 날, 낯선 곳에 할머니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 같아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다 가다 울다 가다를 반복했다고 했지. 그 때 난 일본의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떠올랐어.

오에 겐자부로는 선천적으로 뇌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특수교육기관에 장기간 맡기러 갔어. 아들을 두고 정문을 나선 그는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안 되겠다. 눈에 밟혀서 도저히 안 되겠다. 데려오자"며 차를 돌렸다고 회고했었지. 결국 그는 아들을 작곡가로 키워냈지만, 당시 너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어.

갑자기 웬 편지며 웬 흰소리로 상처를 긁어대냐고 쥐어박을 듯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선하다. 그렇담 미안해. 사실은 엊그제 영화 '아이리스'를 보고 난 뒤 네 생각이, 아니 네 할머니의 생각이 들러붙은 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영국의 여성 작가인 아이리스 머독의 실화를 옮긴 영화였어. 저명한 소설가인 그녀는 일흔여덟살에 치매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대. 처음엔 영국 총리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미한 증세로 시작했으나 점점 '개(dog)'를 '새(bird)'라고 하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할 정도로 중증이 됐지.

언어를 직조해 사상과 현실을 담아내는 작업을 해 온 작가에게 언어를 인식하는 회로가 엉켜버렸다는 건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는 거였지. 50년 넘게 해로해 온 영문학 교수인 남편도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양원으로 아내를 보내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아이리스는 요양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든의 나이에 눈을 감아버렸지. 너의 할머니도 입원한 지 보름이 안 돼 이승을 뜨셨잖아.

임권택 감독은 영화 '축제'에서 치매를 '세대를 이어주는 끈'으로 해석하는 특이한 시각을 보여줬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딸아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 애의 부모는 이렇게 설명하지. "얘야, 사람은 늙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간단다. 그래서 할머니의 키가 작아지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할수록 너의 키는 점점 커지고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거란다. 그건 다 할머니가 너에게 전해주시는 거야."

치매란 앓는 당사자보다는 그것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의 고통이 더 큰 질병일 거야. 그건 치매가 기억에 관한 병이기 때문이 아닐까. 당사자는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백지의 자유로움'이 있는 반면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는 좋았던 기억이 훼손되고 망실되는 것에서 아픔을 맛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

기억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우리는 젊음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 나이 먹음에 초조하고 흰 머리와 주름을 가능한 한 숨기고 싶어하쟎아. 게다가 사회적으로 용도가 소진됐다고 치부되는 노인들은 유폐하다시피 하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야.

그렇다면 이 시대에 치매는 노인들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지도 몰라. 앞 세대는 전쟁의 참혹한 기억과 경제적 궁핍의 기억과 민주주의를 위한 분투의 기억을 갖고 있는데 젊은 세대는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학자들은 이를 '역사의 망각'이라고 부르겠지.

의학용어로 알츠하이머병이라 불리는 치매는 언젠가는 치료제가 개발되리라 믿어. 하지만 어른들을 추방하는 시대, 역사를 잊어가는 시대를 위한 처방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심란(心亂)을 부추겨서 미안해. 곧 다가올 할머니 기일(忌日)엔 꼭 동행을 허락해줘. 기다릴게.

이영기 기자

note

주연:케이트 윈슬릿(젊은 시절의 아이리스)·주디 덴치(노년의 아이리스), 짐 브로드벤트(아이리스의 남편)

감독:리처드 아이어

상영 극장:메가박스(6002-1200)·코아아트홀(739-9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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