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선거권 정부가 막아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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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은 밀리에르 신부의 자비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장발장을 다시 감옥에 돌려보내기 위한 자베르만 경감의 끈질긴 추적이 계속된다. 부하들이 장발장을 막 체포하려는 순간 자베르만 경감이 이를 막아선다.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꼭 1백40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우리나라 헌법 제24조(선거권)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고,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6조에서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끔 선거권 행사를 보장하고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23조는 장애인의 선거권 행사의 편의를 위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편의시설·설비의 설치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법을 들먹이는 이유는 19세기의 법질서와 21세기인 현재 우리 한국 사회를 비교해 보고자 함이다.

지난 4·13 총선에서 휠체어 장애인 서승연씨가 투표소에 입장할 수 없어 투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7명의 장애인과 함께 우리 연구소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법원은 선거권 행사의 보장의무 위반으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함에도 아직도 장애인의 선거권과 관련해 입법 취지에 맞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정당차원의 절차이기는 하지만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자 초청 토론회를 공영방송인 KBS 등 각 방송사가 앞다퉈 주최해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20조(정보에 접근)에 따른 시행령 11조는 각종 선거방송에 수화·폐쇄자막방영 방송프로그램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선거기간 이외에 이루어지는 방송 토론회라는 이유로 수화·자막방송을 하도록 조치하지 않음으로써 청각장애인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있다. 중앙선관위는 장애인 단체들이 모든 투표소에 장애인의 접근권 보장 요구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올해는 6월 지방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양대 선거에 장애인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분명히 밝힐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편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매 선거시 17~20% 정도의 투표소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에 설치되고 있다),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선거관련 방송시 정보접근이 차단돼 선거 참여에 제한을 받게 된다면 이는 국가 스스로가 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꼴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6월에 치러질 선거에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는 장소에 투표소를 설치한다면 가장 최근에 제정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 제6조를 어기는 꼴이 된다. 우리 나라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장애인의 선거권을 정부가 막고 있다면 장애인들은 물론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조차 국가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관계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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