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박사를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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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공계 기피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공계 학생들의 해외유학 지원을 늘리겠다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만 해도 학부 정원을 줄이고 연구중심 대학을 지향하고 있는 마당에 해외유학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과학자 1세대는 일제 때 일본에 유학한 이태규 박사나 해방 후 한국전쟁을 전후해 미국에 유학한 이휘소 박사 같은 분이 아닐까 한다. 이들 1세대에게 교육받은 2세대는 미국과 유럽의 일류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현재 우리나라 과학계의 고참 세대를 이루고 있으며 상당한 세계적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국내 교육의 수준이 꾸준히 향상돼 2세대에게서 교육받은 3세대 중 적지 않은 수는 하버드 등 유수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들 3세대 인재 중에 국내 박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이 국내에서 학부 교육을 받고 석사 학위 연구까지는 했더라도 박사 학위는 예외 없이 외국의 일류대학에서 받은 것이다.

이제는 4세대를 키울 때다. 차세대 유망주는 우리 손으로 키울 수 없을까? 일본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강훈련을 받은 국내 박사는 유학생보다 자부심이 높았고 교수 채용에서도 대접을 받았다. 그런 풍토 아래 토속 과학자 중에서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가와 히데키부터 지난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노요리 료지(野依良治)까지 수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이공계 기피를 타파하고 국내의 과학기술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방안으로 국내 박사과정의 대폭 지원을 제안한다. 지금도 우수한 학생들은 별 문제 없이 외국 대학이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유학한다. 미국에는 등록금 면제에 충분한 생활비까지 주어지는 1년에 수만달러에 해당하는 장학금이 적지 않다. 반면 국내 대학원 박사과정의 장학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안정적인 지원을 받는 서울대 자연대 박사과정 학생들은 월 60만원의 BK21 장학금을 받는다. 서울대 등록금이 싸기에 망정이지 사립대라면 등록금 내기에도 부족한 액수다. 기숙사도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왕복하느라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기도 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별도로 과외를 하기도 한다. 그런 사정을 아는 교수는 자신이 유학 시절에 했던 대로 연구에 전념하라고 다그칠 염치가 없다.

이제는 국내 교수진의 실력도 웬만한 외국의 일류대학에 버금가고 기자재도 어느 정도 갖춰졌다. 한번 국내 이공계 대학을, 특히 기초과학 분야를 대폭 지원해보자. 그래서 국제 수학·과학올림피아드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큰 꿈을 가지고 첨단 과학에 도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유능한 국내 박사를 일류대학 교수로 채용해 외국유학-국내 박사과정 침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보자. 우물안 개구리가 될 걱정은 안해도 된다. 요즘은 학위 과정 도중에도 얼마든지 외국 학회에 참가할 수 있고, 박사 후 과정을 외국에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박사과정이 활성화되면 아마도 여성 과학도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을 것이다. 이번 학기 내 일반화학 강의 수강생 중 거의 절반은 여학생인데 남학생 못지 않게 의욕적이고 총기가 넘쳐 보인다. 이들 중 일부가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경우 유학을 가는 여학생들도 있겠지만, 수준 높은 국내 박사과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유학보다는 국내 박사학위 과정을 선호하는 여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 또 이들은 국내 박사과정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은 '기초과학은 창조의 뿌리, 번영의 샘'이라는 표어를 제정하고 연구에 정진하는 한편 인류 문명에의 과학기술 기여를 홍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는 대선의 해다. 여야 대선 후보들에게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구상과 실천적인 방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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