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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위협받는 엄마 목격 열 살 소녀 “남자 짝꿍 싫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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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짝꿍 좀 바꿔주세요.”

초등학교 3학년 호영이(10·여·가명)는 학기 초 짝꿍을 정할 때마다 담임선생님을 찾아간다. 선생님에게 “남자 짝꿍이 싫으니 바꿔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어쩔 수 없이 남자아이 옆에 앉게 됐다. 그날 호영이는 집에 돌아와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 짝꿍이 자신의 연필을 빼앗아 장난을 쳤다는 이유였다. 호영이의 ‘남성 기피증’은 2년 전부터 시작됐다. 2008년 여름 엄마와 단 둘이 살던 집에 칼을 든 강도가 침입했다. 큰 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호영이가 입은 정신적 충격은 컸다. 범인이 엄마를 위협하는 현장을 목격한 뒤부턴 남자만 보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호영이는 1년 넘게 상담을 해준 대학생 언니에게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고 털어놓았다.

# 어머니의 죽음이 부른 자살

지난해 12월 회사원 김모(28)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 동료와 술을 마시고 귀가한 뒤였다. 동료는 경찰에게 “김씨가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몇 번씩 되뇌었다”고 진술했다. 홀몸으로 김씨를 키운 어머니는 경기도 용인에서 호프집을 운영했다. 2000년 여름 어느 날 밤, 맥주를 마시던 손님들이 자리를 뜬 뒤 묵묵히 혼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김씨 어머니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 현장에 고모가 함께 있었지만 손 쓸 새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당시 김씨는 고등학생이었다. 정부에서 나온 피해자 지원금은 1000만원. 김씨는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며 범인의 몽타주를 담은 전단지를 만들어 인근 지역에 뿌렸다. 범인을 추적하는 데 전 재산을 쏟았다. 하지만 성과 없이 9년이 지났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범인을 잡지 못한 자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우울증을 앓던 그는 끝내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범죄 피해를 보거나 현장을 목격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린다. 이번에 김수철에게 성폭행을 당한 A양(8)과 부모도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범죄 피해자들이 이처럼 ‘소리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 이용우 회장은 “지난해 26만 명이 강력범죄 피해를 보았지만 그중 전문가로부터 상담을 받은 이들은 1092명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전체의 0.4%에 불과한 비율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강력범죄 피해자 178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6%(110명)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시작하는 게 힘들다”고 답했다. 연구원 김지영 박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느껴진다’(58%), ‘사건을 상기시키는 장소·사람들을 피하게 된다’(80%)고 답할 정도로 정신적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A씨는 매일 몸에 칼을 품고 다닌다. 그는 “골목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흐른다”고 했다. 그를 면담한 정신과 전문의 이근덕 박사는 “극심한 피해망상과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현재 전국 400여 개 병원이 피해자지원연합회와 연계돼 정신과 치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데다 자비 부담이어서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이 박사는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기록이 남는다고 생각해 치료를 꺼리곤 한다”며 “범죄 피해자에 대해선 진료 내역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한편 정신적 부담이 덜한 전문가 상담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죄 피해자 지원단체 ‘햇살’의 심연주 사무국장은 “범죄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기금이 턱없이 적어 40%를 민간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임시숙소 마련해야=미국은 강력범죄 사건이 일어나면 민간·정부 운영 센터에서 피해자에게 자원봉사자를 파견한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정신적 충격을 입어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경찰 조사 후엔 거주지까지 데려다 준다. 혼자 지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지원센터에서 마련한 임시 거주 공간으로 안내한다. 특히 학생이 피해를 보면 해당 학교의 전체 수업을 중지시킨 뒤 학생들에게 집단 심리치료를 실시한다.

일본은 신체적 피해는 물론 직장 근무 등 일상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따른 정신적·경제적 피해까지 고려해 범죄피해 구조금을 산정한다.

법무부는 7월 복지센터를 열어 범죄 피해자에게 정신 치료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방화 범죄 등으로 거주지를 잃었거나 집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 사실상 생활하기 힘들 때는 개인·가족 단위로 1~3개월간 임시숙소를 제공한다.

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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