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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천도교·학생 동원 기획한 현상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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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893년 오늘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린 현상윤(玄相允·1893~1950)은 『조선유학사』(1948)와 『조선사상사』를 펴내 우리나라 유학사와 사상사 연구에 초석을 놓은 학자이자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봄비가 도쿄의 거리에 촉촉이 내리던 1915년 4월 10일 저녁 현상윤은 상념에 젖었다. “15세 되었을 때에 옳다고 인정하였던 것을 20세 되어 아니라 부정하였는데, 20세 되었을 때에 옳다고 허(許)하였던 것이 오늘에 와서 보니 또 아니로구나(‘비 오는 저녁’, 『학지광』5).” 무엇이 옳은 것인가? 보성학교를 졸업한 20세 되던 1912년 그는 15세까지 헤어나지 못하던 ‘고루하고 편협하고 부패하고 저열한 병적 주자학’을 부정하고 ‘툭 터진 서구사상’으로 전향했다. 그런데 3년 만에 왜 그는 다시 번민에 빠졌을까?

앞선 지식을 얻기 위해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그는 사회진화론에 젖어 들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를 논거로 인종적 불평등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를 고취해 독립을 꿈꾸게 하는 긍정적 요소로도 기능할 수 있었지만, 강자이자 적자(適者)인 일제의 지배에 순응케 하는 패배주의에 빠지게 만들 소지도 컸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았다. “기미(期米)를 이팔(二八)에 판다.” 1919년 1월 중앙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도쿄 유학생들이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결행한다는 암호전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2·8독립선언서를 인쇄할 활자와 거사자금 3000원을 구해 국내에 들어와 있던 후배 송계백 편에 건네줬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천도교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유효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졸업한 보성중학은 천도교가 경영하던 관계로 나는 도쿄에서 돌아온 후로 여러 차례 교장이던 최린씨를 방문해 천도교를 움직일 계획을 진언했다.” 그때 그는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최린·권동진·오세창·손병희 등에게 전해 천도교단이 3·1운동 참여를 결정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나는 육당(六堂·최남선)에게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시킴이 어떠하냐, 또 그렇게 하는 데는 정주의 이승훈씨를 상경(上京)케 함이 어떠하냐’고 물은 즉 ‘좋다. 그리하자’하는 지라.” 그는 최남선을 움직여 천도교와 기독교가 손을 잡는 데도 기여했으며,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학생들의 독립운동 참여도 이끌어 냄으로써 3·1운동이 거족적 운동으로 승화하는 데도 일조했다. “송진우와 나는 독립운동은 선언서를 발포하는 문서운동만으로는 그 효과가 크지 못하므로, 반드시 질서정연하고 대중적인 시위운동이 있어야만 하는데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학생뿐이라고 생각했다.” 3월 1일 그날 그는 태화관에 없었다. 33인과 함께 검거되어 2선에 남아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2년의 옥고를 치른 그는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겼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