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이 버크(1901~96)
나는 로스앤젤레스 함상으로 찾아가 버크 제독을 만났다. 그는 의젓한 군인이었다. 그는 1949년에 이른바 ‘제독의 반란’이라고 하는 사건으로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참전한 상태였다. 그 사건이라는 것은 당시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이 “B-36 폭격기만 있으면 항공모함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버크를 비롯한 해군 지휘관들이 반기를 들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는 특히 지상부대와 해군의 협동작전에 대해 밝았다.
나는 우리 국군이 부족한 것을 미군에 자주 요구했다. 상대방이 아주 뻔뻔하다고 여길 정도로 요구량이 많았다. 전쟁 발발 뒤 각 전선에서 마주치는 미군들에게 나는 염치불고하고 지도와 그 위에 늘어놓는 표지물들을 잔뜩 받아냈고, 전차와 야포 지원도 과감하게 부탁했다.
내 부하 중의 하나는 그런 나를 “백 사단장이 미군에게는 낯이 두껍다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을 요구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버크 제독에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함포 지원을 부탁했다. 버크 제독은 그런 나를 잘 받아줬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이 1951년 함흥 해역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한 뒤 항복 조인식이 열렸던 전함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함포 지원을 부탁했다. 대형 전함에서 미군 수병들은 함포 사격 구령에 맞춰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캐딜락 한 대 날아간다(One more cadillac on the way).” 전쟁은 그렇게 많은 것을 날려 보낸다. 그렇게 비싼 ‘캐딜락 포탄’을 나는 미군의 사정을 마음에 두지 않고 부탁만 했으니 함대 지휘관 버크가 달가워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성의를 다했다.
그래도 석연치 않았던지 그는 회고록에서 “백 소장은 우리에게 일방적 요청만을 해오며 매일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탄약 전량을 요구했다. 그는 탄약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는 1901년생으로 나보다 19살이나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역전의 해군 지휘관 입장에서는 한참 나이가 어린 내가 같은 소장 계급을 달고 값비싼 함포 지원을 ‘일방적으로’ 요구했으니 괘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 요청을 대부분 들어줬다. 우리는 그의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거침없이 북상했다. 해금강이 보이는 남강 근처에까지 바짝 전선을 올려붙일 수 있었던 것은 버크 제독의 통 큰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지만, 당시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금강산을 확보할 수 있는 고저(庫底) 공격을 구상했다. 그러나 워싱턴과 유엔총사령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반대에 부딪혀 그 구상은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아쉽기 짝이 없는 대목이다.
그래도 전투는 38선을 중심으로 아군과 적군이 서로 유리한 지형을 먼저 확보하기 위한 고지전 형식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기동전은 아니었지만, 고지 탈환을 위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치열한 전투였다.
그런 전투현장에선 늘 함포 지원이 필요했다. 버크 제독은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미시간 대학에서 화약을 공부해 그 분야에 정통했다. 그는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에 관측 장교를 파견했다. 그 전에는 공중 관측에 의존해 함포 사격을 했다. 정밀성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육상 관측이 필요했다. 버크 제독은 자신의 참모 절반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버크 제독 자신도 자주 군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지휘관과 참모들이 자주 오고 가면서 국군 1군단과 미 5순양함대는 신뢰가 깊어졌다. 언젠가 그는 나를 찾아와 “실제 전투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함께 야간 수색에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흔쾌히 나섰다.
그는 “장성 두 명이 함께 나서는 야간 수색이니 대단하다”며 좋아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