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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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그 무렵 두목은 자신의 시 구절 '늘상 걱정이 여기에 미치면 술 취했다가도 근심에서 깨어나누나(往往念所至 得醉愁蘇醒)'처럼 우국충정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곧 술이 깨는 즉시 장보고와 정년의 탐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관아는 자성 안에 있는 아성(牙城)내에 있었는데, 두목은 출근하자마자 관원들에게 우선 물어보았다.

물론 많은 관원들은 장보고와 정년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잣거리의 기녀들처럼 장보고와 정년을 천하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원들은 장보고와 정년이 이사도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기는 하지만 최고의 공신은 무령군 절도사였던 이원과 그의 아장 왕지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목은 잘 알고 있었다.

'만 사람의 뼈가 말라 버려져야만 한 사람 장군의 공을 이룰 수 있음(一將功成萬骨枯)'을. 절도사 이원과 왕지흥 장군이 그토록 무공을 세울 수 있음은 만 사람의 뼈가 말라죽은 희생 끝에 이루어진 것임을. 그러므로 실제로 최고의 영웅은 저잣거리의 여인들이 노래 부르고 있듯이 장보고와 정년인 것이다.

그 증거로 장보고와 정년은 두 사람 똑같이 군중소장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물론 군중소장은 최고의 계급은 아니다.'구당서'에 보면 '소장(小將)'이란 군직의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절도사의 부하로 부대의 책임자인 대장 다음가는 부장(部將)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대당육전(大唐六典)'의 '상서병부'를 보면 '소장은 자장(子將)을 가리키는 말'로 '모든 군진(軍陣)에 병사 5백명이 있으면 압관(押官) 한 사람을 두고,1천명이 있으면 자총관(子總官) 한 사람을 두며,5천명이면 총관 한 사람을 둔다'고 하였다.여기에서 말하는 '자총관'은 곧 '자장'을 가리키며, 따라서 장보고와 정년은 군사 1천명을 부릴 수 있는 '자장', 즉 '군중소장'의 위치를 가졌던 계급이었던 것이다.

물론 군중소장은 대장이나 총관과 같은 최고의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장보고와 정년 두 사람 모두 당나라 사람이 아닌 신라인이고 보면 외국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었던 것이다.

이는 장보고와 정년이 이사도의 난을 평정한 최고의 공신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아닐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두목은 두 사람을 당나라의 관아에서 추적할 것이 아니라 다른 곳, 즉 신라인들 사이에서 추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무렵 양주에는 왕정(王靖)이란 신라상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그는 무역을 통해 최고의 거상이 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상인이었던가는 그의 이름이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일기에 나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엔닌은 당나라에 건너온 직후 양주의 한 사찰에 머무르고 있었다.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그 무렵 양주에는 '효감사(孝感寺)' '안락사(安樂寺)' '백마사(白馬寺)' '선지사(禪智寺)' 등 40개가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엔닌은 그 중의 하나인 개원사(開元寺)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개원사에 머무르고 있던 엔닌에게 신라 상인 한 사람이 찾아오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왕정이었던 것이다.

이 때가 개성(開成)4년 839년 1월 8일이었다.

"신라사람인 왕정이 찾아와 서로 만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국 홍인(弘仁)10년 819년에 당나라 무역상 장각제(張覺濟) 등과 함께 교역을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다 표류하여 일본의 데와(出州)국에 유착하였던 사람이었다. 표류하게 된 경위를 물었더니 일러 말하기를 '여러가지 물품을 교역하기 위해서 이곳을 떠나 바다를 건너다 갑자기 폭풍을 만나 남쪽으로 떠내려가기를 3개월간, 데와국에 유착하였습니다. 장각제 형제 두 사람은 바로 출항하려고 할 때야 같이 도망쳐 데와국에 머물렀습니다. 북데와에서 북해를 거쳐 출항하여 순풍을 만나 15일이 되어 나가토(長門)국에 유착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일본어를 매우 잘 해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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