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전기 철조망과 월드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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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꼭 한 달 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준비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를 찾았다. 그곳은 설악산 대청봉(해발 1708m)보다 높은 고원이다. 남아공 백인 가이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했다. 차창 너머 남아공 풍경은 영국 잉글랜드 지역과 비슷했다. 둥글둥글한 구릉이 이어졌다. 남반구 초가을 햇살은 약간 따가웠다. 푹푹 찌는 열기는 없었다.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했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와 눌러앉았는지 알 만했다. 그만큼 자연환경은 뛰어났다.

고개를 돌려 인간들이 만들어 낸 환경을 살폈다. 널찍한 초원 중간중간에 빌라 단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단지들은 모두 연한 황토색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높이가 2m는 족히 돼 보였다. 담장 위에는 30~50㎝는 돼 보이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가시 철조망이 아니었다. 가이드에게 “왜 담장 위에 저런 철조망을 설치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도둑들을 막기 위한 전기 철조망!”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차가 요하네스버그 시내로 들어서자 흑인 거주 지역이 나타났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가족들이 자는 단칸방이 있는 구조였다. 도로변에 집이 있는 흑인들은 바나나 등 열대 과일과 채소를 팔고 있었다. 시들어 신선한 맛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또 다른 흑인은 남아공 전통 나팔인 부부젤라 30여 개를 쌓아 놓고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그의 뒤편에는 검은 피부 때문에 눈 흰자위가 도드라져 보이는 소년이 배꼽을 드러낸 채 흙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전기 철조망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가이드는 “훔쳐 갈 물건이 없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남아공 흑인들은 극심한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올 1분기 공식 실업률이 24.2%였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미국 실업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흑인들의 실제 실업률은 40%에 육박한다는 말도 들린다. 그들이 남아공 인구의 80%를 차지하지만 전체 부의 10% 남짓을 소유하고 있다. 반대로 인구 10%인 백인들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가이드는 “흑인들 가운데 빚내거나 훔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굶어 죽을 처지인 사람들이 상당수”라며 “우리(백인)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전기 철조망에 의지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들도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월드컵 이면에서 보게 된 남아공의 불편한 진실이었다.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은 94년 폐지됐다. 정치·행정·사법 권력은 다수인 흑인들에게 넘어갔다. 경제 권력은 여전히 백인들의 수중에 있다. 이른바 경제적인 의미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여전한 셈이다.

요즘 남아공에서 도난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좀도둑들이 관광객뿐 아니라 선수단 물건까지 훔쳤다고 한다. 한국 응원단과 선수단의 안전이 걱정이다. 어떤 이는 “월드컵을 유치한 나라가 치안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남아공 정부를 꼬집었다.

해외 여행 중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안다. 하지만 내 한 쪽 귀에는 남아공 백인 가이드가 한 말이 맴돌고 있다. “빚내거나 훔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굶어 죽어야 하는….”

강남규 경제부문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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