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현해탄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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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일본의 여배우 후에키 유코(笛木優子·23)와 한국의 김윤경(24). 국적은 달라도 두 사람의 꿈은 닮은꼴이다.'유민'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얻은 후에키는 한국 드라마에 출연하며 스타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일본에서 방영된 미니 시리즈의 주연을 맡았던 김윤경은 그 반대로 '남벌(南伐)'의 포부를 키우는 중이다. 이 두 여배우가 만났다. 장소는 전통의 공간 덕수궁. 이미 양국의 방송 현실을 충분히 체험한 이들에게 현해탄이란 물리적 거리는 무의미했다.

연기 열정에 국적이 무슨 소용

지난해 9월 후에키(이하 유민)는 홀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1년6개월 전 자신에게 큰 감동을 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쉬리'의 나라를 찾아온 것이다. '호타루'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일본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인이었던 그녀로선 '보장된' 코스를 과감히 벗어난 셈이었다.

다행히 한국은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MBC 주간 단막극 '우리집'에서 청각 장애인 '다인'역으로 출연 중인데, 팬클럽 회원이 1만명을 넘었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

"정말 내 일처럼 기분이 좋다. 그런데 너무 외롭겠어. 나도 지난해 일본에서 혼자 지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거든. 그때마다 나라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지."

김윤경이 유민의 과거사를 듣다 말고 살짝 끼어든다. 일본이 제작하고 그녀가 주연을 맡은 4부작 드라마 '결혼의 조건'은 지난 3일부터 일본 아사히 TV에서 방영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후속작 출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외롭긴 하지만 꿈이 있어 그런지 견딜 만해요. 모두들 잘해 주시고요." 유민의 말이 이어진다."물론 처음에는 속도 많이 상했어요. 방송사 홈페이지에서 저를 일본인이라며 강하게 비난하는 글을 종종 봤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앞만 보고 갈 거예요."

유민은 한국어 듣기는 자신 있지만 말하기가 아직 서툴다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요즘엔 한국말을 익히기 위해 god·왁스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고 했다. 언어의 장벽과 공부 열정은 김윤경도 마찬가지다. 촬영장에서도 틈만 나면 일본어 교재를 펴든다.

이들이 이처럼 어학에 열심인 이유는 한가지다. 진정한 국제 스타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유민과 김윤경, 이들은 일시적 '충동'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한·일 방송현실 너무 다르다

"스케줄을 어긴다고요?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김윤경이 분위기를 돌려 지난해 일본에서의 촬영 경험을 꺼냈다.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로 나오는 스태프들이 종종 있는데, 물어 보면 스케줄을 짜느라 밤을 새서 그렇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철저한지 보름 전에 방송 대본이 나오는 건 기본. 모든 촬영은 철저히 배우 위주로 진행되도록 배려한다.

"서울에 돌아왔더니 촬영 30분 전에 대본이 나오더군요. 배역 설명은 30초고요. 한국에 왔구나 실감했죠."

이때 유민이 한국 방송의 공영성을 향한 노력은 너무나 부러운 현실이라며 말을 돌린다. 일본에서는 밤 11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민영 방송에서 적나라한 성애(性愛)를 담은 프로를 방송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공영성이 늘 문제가 된다고 알고 있지만 일본에 비할 수 있나요. 특히 시청자 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마음을 열면 어느 문화나 배울 점이 있다는 것. 이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문화로 장벽을 넘는다

"기적이었어요." 유민이 말했다. 대화가 영화 '쉬리' 이야기로 막 들어 가던 중이었다. 유민은 이 영화를 통해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 엄청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를 포함해서 한국을 잘 모르는 일본 젊은이들이 무척 많았어요. 심지어 미국의 한 주 정도로 알고 있는 애들도 있어요. 영화가 이 생각을 바꿔 놨죠." 그러자 옆에서 김윤경이 "맞아요.일본에 있을 때 어찌나 답답하던지…"라고 말을 받는다.

김윤경은 특히 일본 드라마 속의 한국이 가난·아동 학대 등으로 점철돼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해 촬영 과정에서 문제되는 부분은 항의해 모두 대본을 고쳤다고."결국은 문화 교류만이 잘못된 국가관을 교정해 주는 것 같아요."

이 대목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는 건 정치가 아니다. 문화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중심에 서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인터뷰 말미에 덕수궁 경내를 거닐며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자주 만나자며 휴대폰 번호도 교환했다. 경내를 나설 때까지 손을 놓지 않은 두 사람은 동류(同類)로서의 공감대를 주고받는 듯했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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