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法 부추기는 정치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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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깨끗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민주당 경선주자 김근태 상임고문이 3일 양심선언을 통해 지난 전당대회에서 권노갑 전 고문으로부터 받은 2천만원을 비롯해 2억4천여만원의 불법적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밝힘에 따라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권에 적지 않은 파문이 일고 있다.

金고문의 양심선언은 현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후원금의 상한을 정해 놓고 있는 현 제도가 역설적으로 정치자금의 짜맞추기 신고를 조장하고 있으며, 선거관리위원회도 이를 효과적으로 실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세부내역이 공개되지 않아 시민단체 등도 이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깨끗한 정치를 한 것으로 알려진 金고문이 이러할진대 정치자금의 원죄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이로 인해 출범하는 정권마다 대선자금에 발목이 잡히며, 정권을 잡은 쪽에서는 정치자금 사정(司正)을 수단으로 의원 빼내오기 등 국민의사와는 관계 없이 의원 줄세우기를 한다.

우리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가 이렇게 정치자금과 연관돼 있는 것이 명백한 이상 이번의 용기있는 고백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겨버리거나 정치적 공격의 호재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정치와 경제가 더 이상 정치자금에 발목잡히지 않도록 정치권은 모두 자기반성과 아울러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제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완전 공개하는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이 허용하고 있는 정액영수증제는 실명제를 위반하고 있는 제도이므로 폐지해야 하며, 정치자금은 수표를 사용하는 실명기부만을 허용해야 한다. 정치자금의 출납도 선관위에 신고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계좌로 일원화하고, 그 이외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해야 한다.

아울러 국고보조금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총재의 휘호가 들어간 달력을 제작하는 데 국고보조금을 사용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국고보조금은 제왕적 총재의 사금고로 전락한 실정이다. 이는 또한 보스 중심의 사당적 정당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어 정당의 민주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1년에 2백60억원에 달하는 정당에 대한 경상비 보조를 과감하게 철폐하는 대신 이를 정당의 민주적 운영의 근간이 되는 당내 경선을 보조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국가를 제외하고는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대해진 우리의 중앙당 조직을 축소하고 정당민주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헌정 사상 처음 실시되는 국민경선제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국고보조금도 지금처럼 정당에 주는 것이 아니라 후보에게 지급해야 한다.후보 개인에 대한 선거자금 지원은 1인당 10만원 이하 소액의 정치자금을 일정수 이상 모금한 후보들에게 그 모금한 액수에 비례해 국고보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액다수의 정신에 부응한 후보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정경유착으로 인한 정치부패를 방지하고 국민의 건전한 정치참여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적돼야 할 것은 현행 후원회 제도가 중앙당과 지구당, 그리고 국회의원 입후보자에 대해서만 후원회 결성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장을 비롯한 지방선거 입후보자나 당내 경선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음성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들의 후원회 구성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쳐야 한다. 한 명에게서 받은 1억원은 이권이 개입될 소지가 있지만,1인당 십만원씩 만명에게서 받은 10억원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 점을 감안해 후원금의 모금한도액은 증액하는 대신 개인이나 법인이 기부할 수 있는 기부한도액은 대폭 낮춰야 한다.

이같은 제도적 개선만이 부정한 정치자금으로부터 정치인을 자유롭게 하고,나아가 이들을 잠재적인 범법자가 되지 않게 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정치권 스스로 제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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