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7>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⑪ 'IMF행 검토'왜 쉬쉬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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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97년 11월 9일 오후 9시30분 인터컨티넨탈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연 공식 대책회의엔 강경식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필자 외에 이영탁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도 참석했다.

당시 상황을 姜부총리가 고건 국무총리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지만 姜부총리가 하루종일 국회에 매달려 있어 시간을 내기 어려운 때였으므로 우리가 이영탁 실장의 참석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었다.

우리는 또 실무적으로 짚어볼 일이 생길 경우에 대비, 재경원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외에 경제비서실의 윤진식 비서관을 배석시켰다. 한은에선 정규영 국제부장이 나왔다.

姜부총리는 'IMF행'보다는 시장 안정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에 중점을 두고 간략히 설명했다.

사실 姜부총리와 내가 그토록 IMF행의 보안을 지키려고 했던데는 이유가 있었다.

해당국과 IMF간에 금융지원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 돈이 들어올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면서 IMF행이 알려지면 시장에 호재로 작용하지만, 그런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IMF행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지면 외환시장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방증해 되레 엄청난 악재로 작용하는 것이 국제 금융계의 상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IMF행을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뒷날 감사원·검찰은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왜 빨리 IMF에 가지 않았느냐고 우리를 내몰았다.

이런 사정으로 9일 밤 공식 회의에선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姜부총리의 설명을 들은 뒤 곧바로 환율대책 집중 토의에 들어갔다.

그 무렵 시장의 환율 상승 압력은 대단했다. 금요일인 11월 7일 외환시장의 달러당 기준환율은 9백75원으로, 달러당 1천원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특히 일부 전환종금사들이 결제를 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가는 데다, 환율이 더 오를 것이란 심리 때문에 환율이 올라도 달러를 내놓기는커녕 무조건 달러를 사고보자는 가수요까지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이경식 한은 총재는 환율제한폭을 완전히 없애자는(free drop) 의견을 내놨다.

윤진식 비서관도 같은 의견이라고 했다.

사실 환율 결정을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평소 姜부총리와 필자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환율변동제한 폐지는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긴 했지만,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시 외환시장은 시장으로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고, 환율은 가격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환율이 오르면 달러 수요가 줄고 공급이 늘어나면서 수급이 맞춰져야 정상이지만,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고 외채상환 등 달러수요가 많은 당시 상황에서는 환율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도록 환율변동을 자유롭게 허용한다 해서 달러 공급이 더 늘어나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이에 따라 마치 부동산시장에서 가격이 오르면 더 많은 부동산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들이 팔려고 중개업소에 내놓았던 부동산마저 거둬들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외환시장에 달러가 어떻게 들어올지에 대한 보장이 없는 형편에서 환율변동제한을 없애면 외국투자자들은 한국 정부가 환율정책을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姜부총리는 종합대책이 설 때까지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동안 상한선을 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환율을 방어하고, 그 뒤 변동폭 제한을 푸는 문제를 재론하기로 결론을 냈다.

다음날인 11월 10일 오전 10시 姜부총리는 청와대로 들어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날 밤 토의한 금융외환시장 안정 종합대책의 골격을 보고했고, 필자가 배석했다.

姜부총리는 전날 밤 심야 회의 결과를 정리한 메모를 손에 들고 있었다.

"대책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안정되지 않으면 IMF에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IMF에 가는 것은 어려운 문제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6개월간 정치 상황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IMF 지원을 받게 되면 구조조정이 필수적인 만큼 IMF 뒷받침이 구조조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金대통령은 담담하게 "알았다. 그대로 계속 추진하라"고 말했다.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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