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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의 쾌감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그의 책을 대할 때마다 나는 변비 기운을 느낀다. 프랑스의 명문 '에콜 노르말' 출신으로서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과업을 돕고, 볼리비아 밀림에서는 체 게바라와 같이 싸웠으며, 그 뒤 『아옌데와의 대화』 집필을 통해 칠레 '인민연합'정부의 대의를 세계에 알렸다. 실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런 그에게도 악몽이 있었는데,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뒤 게바라에 대한 정보 제공을 대가로 석방됐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본인은 펄쩍 뛰지만, 한발 더 뛰는 사람들도 있어 그냥 '없었던 일'로 돌리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이렇게 사정이 '찝찝하니' 내 변비가 도질 수밖에.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범

그 당자인 레지 드브레 역시 증세가 비슷한 듯했다. 최근의 저서 『지식인의 종말』(예문·2001)은 '배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원하고 화끈하게 '맺힌'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지식인 권력을 분석한 자신의 다른 책에서 그 권력이 대학의 시대(1880~1930), 작가의 시대(1920~60), 언론의 시대(1968~현재)로 이동했다고 관찰했다. 그러나 지식인의 종말을 외치는 이번 책의 관심은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그 '대비'다. 1890년대 드레퓌스 사건 당시 부당한 판결에 항의한 작가들이 '최초의 지식인'이라면, 1970년대 선배들의 양심과 용기를 외면한 '최후의 지식인'이 나타났다. "과거의 프랑스 지식인은 빛을 밝혀주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엑소시스트가 되었으며"(11쪽), 그래서 "지난 1백년 간의 진화는 일종의 퇴화였다"(19쪽)는 것이다.

전쟁과 보도 매체에 무슨 유기적 관계가 있는가? 드브레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책에 대한 신문의 승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신문에 대한 라디오의 승리며, 베트남 전쟁은 라디오에 대한 텔레비전의 승리고, 코소보 전쟁은 텔레비전에 대한 인터넷의 승리다. 이처럼 미디어 확산과 함께 진행된 책과 지식의 세속화가 지식인을 타락시켰으니, "시인은 출판하지 않더라도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글을 출판하거나…개인의 생각을 널리 알려야"(27쪽)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광고업자였다. 선전은 그의 숙명이었다"(29쪽)는 조롱에서 우리는 언론에 품은 드브레의 유감을 짐작하게 된다. 일례로 "작가는 출판사의 고용인이 되고, 시평란을 채워주는 평론가도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52쪽) 형편이다. 지식인은 "언젠가 '르 몽드'에 자신의 이름이-기사의 필자로든, 기사에 언급된 인물로든-인쇄되기를 바라면서 이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54쪽)이란다. 이렇게 되면 유감을 넘어 '앙심'이랄 수밖에 없다. "새롭게 등장한 성직 계급 '언론'과 밀착한 고위 경찰 '지식인'은 미국의 갱단 전담반처럼 어려운 소명을 충실히 해낸다"(2백2쪽)는 저자의 힐난에 이르면, '이런 젠장'하고 막말이 치밀어오른다.

최후의 지식인에 대한 '임상 보고서' 또한 내용이 아주 고약하다. 첫째, 프랑스 지식인은 자폐증 환자로서 프랑스어가 들리면 방송 채널을 돌리고 회의장에서는 영어로 말하며 "집단 에너지의 70~80%가 파벌 다툼과 금전문제 해결에 소모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마피아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67쪽). 둘째, 현실감 상실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독특한 시각"(73쪽)을 고집한다. 셋째, 비전 부족으로서 "결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알려주는 괴상한 예측 능력을 지닌 사람들"(89쪽)이다. 넷째,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특히 좌파 지식인에게는 "가보(家寶)나 다름없는 저항의 문화가 이제…박수갈채를 좇는 데 열중하는"(1백10쪽) 풍토로 바뀌었다. 다섯째, 즉흥성으로서 "나는 속았다"(1백19쪽)는 한마디 말로써 모든 변명과 변절의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 프랑스든 어디든 이런 논고에서 자유로울 지식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공산주의로 이끈 예수 복음

이 책을 읽는 중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대목은 지식인이 "무엇에 대해 말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91쪽)이라는 드브레의 야유였다. 이 책에서 빌어먹을 하고 혀를 찬 부분은 "소련이 무너지고 하나의 초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자" 대세 동참으로 이익을 챙기려고 이제껏 갈라져 싸우던 "프랑스 지식인들도 하나가 되었다"(1백47쪽)는 탄식이었다. 그리고 이 책이 전하는 가장 침통한 역설의 하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끈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예수의 복음이었다"(1백87쪽)는 앙드레 지드의 고백 같은 것이었다. 혹시 세파에 변비 증세를 느끼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잠시 배설의 쾌감을 맛보기 바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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