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도 에너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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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사무실을 기습 점거해 유리창 등을 부수고 반미 플래카드를 내건 며칠 뒤, 한 기자가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인 제프리 존스씨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답변이 이랬다고 한다.

"학생들이 과격하긴 했지만 그 열정이 좋다. 그 열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앞으로 그 열정이 좋은 방향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다만 집기 등을 부순 건 과격했다."

부시 방한 때 벌어졌던 반대와 찬성의 대립적인 시위를 보고 우리 사회가 두 쪽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은 이 코멘트를 음미하기 바란다. 제프리 존스씨는 미국인이자 피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데도 학생들에 대한 이해심까지 보여주고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가.

지난 2월 1일부터 4일까지 중앙일보가 연재한 기획시리즈 '의원노선 대해부'를 보면 우리 사회도 어느덧 선진국에 버금갈 만큼 분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회의원도, 일반 국민도 진보·중도·보수를 뚜렷이 구별할 수 있었다. 흔히 '그 정당이 그 정당'이라고 손가락질 받아 온 정당들도 그 차별성이 의미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국회의원들의 경우 그 이념적 스펙트럼은 0에서 10중 1.3에서 8까지 종 모양을 이루며 넓게 분포돼 있었다.

이는 싫든 좋든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사회의 이런 이념적 분화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뚜렷해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다소 과격한 대립적 시위나 논쟁이 벌어질라치면 으레 그것을 사회 분열이나 불안으로 보는 시각은 철 지난 것이고 사회의 변화를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대립적으로만 보는 2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은 다양한 색채로 구성돼 있는데 흑과 백 두 가지로만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색맹적 인식일 것이다. 국민의 체형은 사람마다 다른데 옷은 라지(large)와 스몰(small) 딱 두 종류만 생산한다면 누구라도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법과 제도가 짜여져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인 것이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세계를 향해 미국편을 들 것이냐, 테러리스트 편을 들 것이냐를 택일하라고 강박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의 국정연설에서는 북한·이라크·이란 3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다. 무력행사를 암시하는 발언도 거듭했다. 미국의 북한 공격 암시발언은 전략용이고 국내용이며 외교정책적 레토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장난으로 연못에 돌을 던지지만 물 속 개구리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이솝우화처럼, 비단 북한만이 아니라 전쟁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부시 방한 반대 시위와 그 찬성 시위를 두고 뭐 '남남갈등이 더 큰 문제''분열구조와 내부갈등이 심각해 우리 사회의 파탄이 우려'된다고? 오히려 시위가 없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법에 어긋난 시위가 지지받을 수는 없다. 아무리 할 만한 주장이라도 법에 어긋난 방법을 썼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의와 시위 자체를 불필요한 분열이나 갈등으로 보는 건 흑백논리다.

일부 학자들이나 언론은 이번 문제에 대한 의견대립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지어 '치유해야 할' 문제로까지 봤지만 그것은 진단도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애당초 치유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념적 지향이 분화되면 그 좌우에 극단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을 중심세력이 논리와 여론을 통해 압도하는 것이 사회적 과제일 뿐이다.

우리는 '갈등'을 보는 눈부터 바꿔야 한다. 갈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갈등에는 부정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의 약이 되고 변화의 에너지가 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억제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살려나가자면 사회구성원의 이념적 다양성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또 그런 존중은 개인적인 아량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제도로써 보장돼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이 합법적·평화적으로 분출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될 때 비로소 갈등의 부정적 측면은 조정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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