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는 생물학적 모순" "전통 이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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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입법.학계에서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막판 논의가 한창이다. 9일 헌법재판소에서는 호주제 위헌 여부 결정 사건의 마지막(5차) 변론이 벌어졌다.

이에 앞서 8일 국회에선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을 연내에 통과시키기 위한 긴급 간담회가 열렸으며, 학계에서도 호주제의 기원을 놓고 학자 간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헌재 공방=호주제 폐지 찬반론자들은 헌재에서 설전을 벌였다. 호주제 위헌론 측 참고인으로 나온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문서 상의 족보와 달리 생물학적인 족보는 암컷, 즉 여성 혈통만을 기록한다"며 "호주제와 같은 부계혈통주의는 생물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생물학자들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라는 기관을 추적해 생물의 계통을 알아내는데 이 미토콘드리아이 유전물질은 암컷에서만 온다는 것이다.

이에 합헌론 측 구상진 변호사는 최 교수에게 "동물 세계의 원리가 인간에도 적용돼야 한다는 근거가 뭐냐"고 따졌다.

지난해 11월 시작해 일년 넘게 진행된 호주제 관련 변론에서 위헌론자들은 "호주제는 남아 선호 사상과 불평등한 혼인관계 등의 뿌리"라며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양성 평등 같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반해 합헌론자들은 "현재의 호주제는 전통적인 가족 문화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상징적인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인간의 존엄성이나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정도는 아니다"고 맞서왔다.

◆국회 긴급 모임=호주제 폐지 관련 민법 개정안이 연내에 통과시키기 위해 여성 의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은 8일 오전 여성 의원과 여성부.여성단체 인사 등을 불러 모아 '호주제 폐지를 위한 긴급대책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서는 "민법 개정안이 내년으로 넘어갈 경우 재.보선 때문에 민법 개정안이 표류될 수도 있다"며 "총공세를 펴 연내 통과를 관철시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한 의원은 "지난 2일 지은희 여성부 장관의 내방을 맞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여성 의원이 야당 총재인 때가 쉽지 않다. 이 호기를 잘 활용하라'는 언질을 줬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부안과 노회찬.이경숙 의원안을 단일화해 심의 소요 시간을 줄이고, 여성단체들이 법사위 의원들에게 호주제 관련 e-메일 '일일 통신'을 띄우자"고 결정했다.

하지만 법사위 소속 한나라당 일부 의원은 "위헌 결정을 본고 천천히 심의하는 것이 좋다"며 맞서고 있다.

◆학계 논의=지난 3일 국회 법사위가 개최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 공청회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이순구 편사연구사는 "호주와 호적이 오늘날의 호적과 다르지만 조선시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에 서울대 이영훈(경제학부) 교수는 지난 6일 국회 법사위에 제출한 관련 논문에서 "호주제는 일부 계층.지역에서만 통하던 관습이었지 법으로 제도화된 수준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오늘날과 같은 가족제도가 아주 오랜 과거에 성립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엄밀하지 않은 '집단 기억'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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