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듯 그려나간 그리움의 파노라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1면

낙서하듯 간략한 필치로 그린 사람들이다. 함께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는 사람들. 단발머리 여인도 등장한다.윤곽선만 희미한 여인들은 옛사랑의 연인 같다. 여인의 커다란 뒷모습 주위로 조그맣게 떠다니는 인물들은 아직도 추억을 벗어나지 못한 작가 자신일 것이다.

원로 평론가 석남 이경성(83)씨의 '사람' 연작에는 고독과 그리움이 함께 숨쉬고 있다. 20일~3월 3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02-734-1020) 1전시실에서 열리는'석남이 그린 사람들'전은 종이나 캔버스뿐 아니라 잡지나 돌 위에 먹이나 아크릴·사인펜으로 휙휙 그려나간 회화 1백여점을 보여준다.

"미술평론가가 전시회를 한다니까 재미있소? 이래봬도 열두번째 개인전을 여는 중견이요."

그는 미술관 관장·교수·평론가·미술사가로 유명하지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40여년 전부터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작품이 모이다 보니 자의반 타의반 전시를 하게 되더군요. 석남 미술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방편으로 개인전을 열다보니 10회가 훌쩍 넘더군요."

작품 수준은? "아마추어 애호가를 넘어 성숙과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해있다"(송미숙 성신여대 교수·미술평론)는 평이다.

이번 전시는 지인들이 마련해준 자리다. 이연수 모란미술관 관장을 위원장으로 예술철학자 조요한, 시인 김남조, 신부 조광호, 조각가 이춘만씨가 '석남전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22일 오후 4시엔 전시장에서 작품집 『석남이 그린 사람들』 출판기념회도 연다. 수필집 『아름다움을 찾아서』와 수화 김환기 작품해설집 증보판 『내가 그린 점 하늘 끝까지 갔을까』도 이번에 잇따라 출간했다.

평론가가 그림 외도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외롭고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지. 그래서 사람 그림만 그리는 거요. 가족이 그립고, 내 인생을 스쳐간 여인들이 생각날 때마다 붓을 잡는 거지. 그림을 그릴 땐 정말 즐겁거든."

부인과 8년 전에 사별했고, 외동딸은 미국에 이민가 있으니 석남은 여의도의 20평 전세 아파트에서 홀로 지낸다. 게다가 지난해에 교통사고를 당한 데다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통에 거동이 편치 못하다."늙은이 혼자 살기 힘들어 이번 전시에서 수익금이 생기면 실버타운에 들어가거나 미국의 딸아이에게 가려고 해요."

석남은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문학부에 재입학,미술사를 공부하다 귀국했다. 해방되던 해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 제1회 광주비엔날레 심사위원장을 거쳐 지난해 올림픽미술관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재 직함은 석남미술문화재단 이사장,호암미술관 자문위원.'영원한 미술관장''제1세대 미술평론가'로 꼽히는 석남은 "나는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자평한다." 평생을 미술이라는 한 직종에서 살아 왔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적당히 가난해서 마음의 죄를 덜 지었다는 점, 적당히 고독해서 낭만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요."

조현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