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김산 일생 영화로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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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람객이고/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중국을 무대로 항일 투쟁을 벌이다 중국 공산당에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회주의자 김산(1905~38)의 일대기인 『아리랑』. 5공 정권이 '판금(販禁)'딱지를 붙였던 이 책은 학생운동권의 필독서 였으며 몇년 전에는 한·미·일 세 나라의 지식인들이 우리 정부에 웨일스의 포상을 청원할 정도로 사료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저작이다.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의 아내로도 잘 알려진 님 웨일스(97년 타계)의 이 유명한 저서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명필름(대표 심재명)이 제작하고 '남부군''하얀 전쟁'의 정지영 감독(사진)이 사령탑을 맡는다.

영화의 주 무대는 상하이·베이징·광저우가 될 전망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김석만 교수가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으며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자문을 맡았다. 이르면 올 연말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들은 지난해말과 올초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답사를 다녀왔다.

『아리랑』의 영화화는 여러 모로 도전이고 모험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사상·이념 문제에서 온전히 홀가분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내재된 경직성이나 폭력·엽기 일색의 블록버스터가 독식하는 최근의 흥행 판도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1백% 중국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되는 만큼 최소한 5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제작비의 회수도 만만찮은 부담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동경비구역 JSA'같은 모범답안이 다시 한번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도 든다. 남·북 이념 갈등이라는 미묘하고도 딱딱한 문제를 따뜻한 휴머니즘과 웃음 속에 녹여냈던 명필름의 잠재력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아리랑』의 영화화를 추진한 적이 있던 정감독이 명필름의 손짓에 흔쾌히 화답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왜 김산을 택했을까. 정감독의 해석을 들어야할 것 같다. "김산은 조선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일념에 중국 공산당에 투신했고, 죽을 때까지도 항일운동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고민했던 인물이다. 여러 이유로 해방 후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진 사람이 됐지만 그의 복원은 남과 북이 함께 해야하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물 속의 소금이 돼서는 안된다'던 그의 고심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좌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명필름은 현지 스태프를 활용하는 등 '무사''비천무''아나키스트'처럼 중국에서 촬영했던 작품들의 사례를 참고할 참이다. 이은 프로듀서는 "다행히 최근 한국 영화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반응이 좋아 제작비의 반 이상을 투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고 말했다.

어느 소설가의 표현처럼 '불화살 같은'삶을 살았던 혁명가. 김산 그가 역사와 사회를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정지영 감독을 만나 성공적으로 역사 속에서 걸어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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