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돌리며 가족애 '재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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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잔소리 vs 막무가내 똥고집.
우리가 익숙한 가족의 풍경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난 우리 가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명절을 맞이해 가족 영화를 골라보는 건 우리의 초라한 일상을 되새기고 싶음보다는, 영화 속 평화로움과 화목함을 닮아보려는 의지에 가까운 건 아닐는지.
'프린세스 다이어리'는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이다. 철부지 여고생은 어느 날 자신이 왕손임을 알게 되고 공주가 되는 교육을 받는다. '공주에겐 안경과 곱슬머리가 어울리지 않아. 뒤뚱거리는 이상한 걸음걸이도 이젠 그만!' 여학생은 고상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 곁가지가 되는 이야기는 허물어진 가족의 복구에 관한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라는 3대의 여성이 화해하면서 정겨운 가족으로 다시 뭉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귀여운 여인'을 만든 게리 마샬 감독의 변함없이 톡 쏘는 듯한 유머 감각이 재치있다.
'어디 가족들이 함께 볼 만한 영화 없나요?'라는 물음에 좋은 답이 되는 건 '노블리'다. 고전적 가족 개념이 현대판으로 어떻게 해체되는가를 보여주는 '노블리'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없다.
노블리는 열일곱 처녀. 어머니는 그녀에게 돈만 요구하고 아기를 임신시킨 남자는 어디론가 내뺀다.
아이를 낳을 곳이 없는 노블리는 쇼핑몰 구석에 남 몰래 숨어살다가 출산한다. 이후 노블리는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어간다. 아이가 줄줄이 딸린 이혼녀, 병을 앓는 누나를 혼자 간호하는 청년 등 어딘가 약간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블리에겐 이 소외되고 정상에서 벗어난 이들이 편안한 안식을 준다. '레옹'의 깜찍한 연기로 기억되는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한다.
가족 영화의 또다른 정답은 이젠 고전이 된 '메리 포핀스'. 뮤지컬과 애니메이션·가족 영화가 뒤죽박죽 섞인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꽤 좋아한다.
철부지 아이들, 근엄한 부모가 메리 포핀스라는 가정교사를 만난 뒤 생활이 뒤바뀐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교사의 정체는 마법사.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난간을 타고 다니며 그녀의 주요한 이동 수단은 우산이다.
바람이 메리 포핀스를 어디론가 실어나른다. 주변에도 괴상한 일은 많다. 혹시 웃음을 터뜨리면 공중으로 부양하는 에피소드를 기억하는지? 메리 포핀스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삶의 활력과 웃음의 철학을 담고 있는 훌륭한 가족 영화다.
외우면 행복해진다는 마법의 주문도 들어있으니…. 관심있는 이들은 다시 챙겨보자.
'가을 소나타'는 우울하다. 영화를 보고나면 가족에 대한 꿈과 희망이 깨끗이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몇년 만에 재회한 모녀가 있다.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지만, 무척 독선적인 여성이다. 어머니에게 딸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겪은 정신적 내상을 하나씩 꺼내보인다.
"당신은 살아있는 모든 걸 숨막히게 해요"라고 쐐기를 박으면서. '가을 소나타'는 사랑할 수 없음에 관한 영화다. 어머니가 '아, 그때는 참 좋았지, 행복했지'라고 회고하는 시간이 딸에겐 고통과 저주의 시간이다.
잉그리드 버그먼은 자신의 유작이 된 영화에서 차갑고 위선적인 어머니상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다. 이건 전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먼이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김의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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