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더 뮤지컬 어워즈’ 남·녀주연상 영광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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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코믹한 이미지서 180도 완벽 변신
남우주연상 정성화

“남우주연상. ‘영웅’의 정성화!”

긴장으로 굳어있던 정성화(35)의 얼굴에는 웃음이 전혀 없었다. 환호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 무대로 걸어 올라갔다.

수상소감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감동을 삭이는 듯한 순간이 지나갔다. 그가 갑자기 턱시도의 품 속을 뒤적였다. 하얀 A4 용지가 나왔다. 수상소감이었다. 객석에 환호와 웃음이 터졌다.

“사실 이 수상소감은 매년 준비했습니다.”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종이를 털어서 펼쳤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3년 전부터 더 뮤지컬 어워즈를 비롯해 뮤지컬 관련 시상식에서 네 번이나 후보에 올랐으나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던 자신을 돌아봤다.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를 빛낸 영광의 수상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왼쪽부터 남우조연상 조정석, 여우주연상 김보경, 남우주연상 정성화, 여우조연상 신영숙. 한국 뮤지컬을 이끌어갈 재목들이다.

정씨는 희극배우 출신이다. 1994년 SBS 공채 개그맨으로 연기를 시작해 사람들을 열심히 웃겼다. 드라마에서도 주로 감초 역할을 했다. 99년 ‘카이스트’에서 어수룩한 조교로, 올해 ‘개인의 취향’에서 주인공 이민호의 선배로 나왔다. 별로 돋보이지 않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머러스한 캐릭터가 그의 단골 이미지다.

“믿음이었습니다.” 수년간 다듬어진 정씨의 수상소감은 이렇게 시작했다. “뭘 해도 중간 이하였고 별 열정도 없었던 저를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푹 빠지게 만든 설도윤 대표님의 믿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에도 저를 돈키호테로 믿어준 신춘수 대표님의 믿음이었습니다. 서글서글하고 별 카리스마도 없을 것 같은 저를 국민영웅 안중근으로 만들어준 것은 윤호진 대표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번 상을 안긴 ‘영웅’의 안중근 역은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비극적이고 강건한 영웅 안중근을 위해 정씨는 코믹한 이미지를 완전히 버렸다. 그는 중국 하얼빈을 돌며 안중근을 몸에 새겨 넣었다. 하얼빈 역, 뤼순 감옥을 찾아갔고, 연구서와 평전을 파고들었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무게감 있고 믿음직한 무대 위 안중근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벨벳 같은 중저음, 확신에 찬 단단한 목소리와 연기가 만나 최고의 작품을 빚어냈다.

사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안중근이 사실은 태생적 희극인의 피가 흐르는 배우라는 걸 객석은 잊었다. 법정에서 일본인을 몰아붙이는 노래 ‘누가 죄인인가’를 부르는 대목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희극 배우는 눈물과 감동을 포괄적으로 선사해 관객을 웃게 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모든 활동은 훌륭한 희극 배우로 가는 과정”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을 확인하게 한 무대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제 동생. 사랑합니다.” 정씨의 수상소감이 눈물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감초 역할과 조연에 만족해왔던 배우는 이렇게 눈물과 웃음을 섞어 승리를 자축했다. 정씨의 공식적인 ‘주인공 선언’이었다. 영웅 안중근으로 무대의 중심에 섰고, 주연상을 거머쥐며 그 자리를 굳혔다. 당분간 뮤지컬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4년 전의 킴’스스로 넘어서다
여우주연상 김보경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변화를 게을리 하지 않고 끊임 없이 배우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신데렐라’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힘겹게 흘렀던 지난 일곱 해가 스쳐가는 듯했다.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그는 얼굴을 무너뜨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시상자로 나온 선배 배우 김진태를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한 편의 뮤지컬 같은 수상소감이었다.

“정말… 흑흑… 생…각도 못했…어요. 근데…받으니까 좋네요 선생님. 하하.”

뮤지컬 배우 김보경(28). ‘미스 사이공’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2003년 데뷔 이후 주로 앙상블에만 머물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4년 전 ‘미스 사이공’의 주인공 ‘킴’역에 전격 발탁되면서 운명이 뒤집혔다. 무명배우였던 그는 제1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꼬박 4년 뒤인 2010년, 그는 우리 공연계가 똑똑히 새겨야 할 이름으로 자리를 굳혔다. 2006년에 이어 4년 만에 다시 오른 ‘미스 사이공’으로 뮤지컬 배우 최고의 영광을 거머쥔 것이다. 이제 ‘김보경’이란 이름은 우리 뮤지컬계가 발굴해낸 보석이자,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널리 기억될 것이다.

대전 혜천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보경은 7년 전 홀로 상경해 단역을 전전했다. 작은 키와 어린아이 같은 음색은 뮤지컬 배우로서 그의 입지를 좁히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숱한 작품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었다. 작은 체구에 풍부한 감성을 꾹꾹 눌러 담았고, 강약을 조절해가며 음색의 폭을 넓혀갔다.

2005년 ‘미스 사이공’의 오리지널 제작진은 ‘아이다’에 출연 중이던 김보경에 주목했다. “독특한 음색”이라며 그를 ‘킴’역에 적극 추천했다. 그는 그렇게 떠밀리듯 오디션에 임했고,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킴’역을 따냈다.

‘킴’으로 분한 그는 무대를 압도했다. 아이 같던 음색은 17세 소녀인 킴에 제격이었고, 풍부한 감수성은 킴의 강한 모성애를 무리 없이 표현해냈다. 당시 평단에선 “2006년은 김보경 발견의 해”라는 말이 떠돌았다.

지난달 김보경은 다시 ‘미스 사이공’무대에 올랐다. 김보경의 ‘킴’은 더 생생하고 깊이 있는 캐릭터로 여물어 있었다. 그는 “4년 전 만들어놓은 킴을 뛰어넘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담감은 농익은 연기력으로 피어 올랐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채워진 송스루(song-through) 뮤지컬인 이 작품에서 그는 예전에 비해 높아진 가사 전달력을 발휘했다. 제작진은 “4년 전보다 킴의 모성애를 더욱 애절하게 표현해냈다”고 그를 평가했다. 더욱 깊어진 연기와 가창력 덕분에 팬들은 그에게 ‘킴보경’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이번 수상은 그런 ‘킴보경’에게 건네는 일종의 인증서다. 우리 공연계는 그렇게 또 한 명의 대형 여배우를 맞이하게 됐다. 

◆특별취재팀 문화스포츠 부문=최민우·강혜란·정강현·김호정·박정언 기자, 영상 부문=김민규·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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