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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방어 '최후 보루' 지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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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정무위.법사위를 거쳐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보여온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 별도 개정안을 상정한다고 한다.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그의 저서에서 기업의 투자는 동물적 본능에 의존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는 물론 투자가 가진 비예측성, 그리고 호황 때는 엄청나게 끓어오르다가 불황이 오면 얼어붙어 버리는 심한 변동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야말로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면서 기업, 나아가 국가경제가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도 가능해진다. 한국 경제의 1인당 국민소득이 40여년 만에 120배가 되기까지 기업가의 공격적 성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에서 공격적 성향은 상당 부분 거세됐다. 이제 우리 기업은 위험을 관리하려고만 할 뿐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악화하고 불확실성이 전반적으로 증대된 데 기인한다.

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 증대요인 중에서 중요한 것이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이다. 외환위기 이후 모자란 외국 자본 유입을 위해 활짝 열어버린 자본시장을 통해 외국 자본이 몰려왔다. 정부는 대환영이었다. '50%+1주'의무공개 매수제도도 폐지했고(98년 2월), 외국인의 상장기업 주식취득 제한(10%) 규정도 폐지했으며(98년 5월), 공개매수기간 중 주식발행 금지 조치(2001년 3월)도 취해졌다. 이와 아울러 국내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도 도입됐다. 5% 이상 주식 매입 시 1% 이상 변동이 생길 때마다 신고하는 '5%룰' (98년 1월), 그리고 대기업 집단 금융계열사 의결권의 제한적 허용(2002년 1월) 조치가 이에 해당한다.

외국인들은 우리 기업들의 주식을 계속 사들였고, 이제 외국인 지분은 상장기업 주식전체의 45%에 육박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외국 자본에 문호를 개방하는 동시에 부채비율 200%라는 숫자를 획일적으로 모든 기업에 적용하며 압박한 결과이기도 하다. 기업들이 주식을 발행해 부채를 갚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쉽게 지분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국 자본의 공격수단 및 여건을 개선해놓고 이제 우리 정부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대기업집단 소속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행사범위를 특수 관계인과 비금융계열사 지분까지 합쳐 현행 30%에서 15%로 축소하려 하고 있다.

사실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너무 취약하다. 배경은 이해하나 결과적으로 볼 때 세계 어느 나라도 국내기업 경영권에 대한 외국인의 공격을 우리나라처럼 쉽게 만들어 놓은 나라는 없다. 공개매수기간 중 주식발행 금지(증권거래법 23조), 제3자에 의한 의결권 관련 증권의 발행이나 배정 제한(상법 418조),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 불능(상법 369조) 등의 조항으로 인해 쓸 만한 경영권 방어수단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기업들은 막대한 현금 투입을 통해 경영권 방어를 시도하고 있다. 2001년 말 8조2000억원이었던 상장기업 자사주 보유총액은 올 상반기 19조원을 넘었고, 주주 배당총액도 2001년 3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7조2000억원으로 증가했다. 배당금 증가분이 경영권 방어와 연결됐다고 보면 어림계산으로 14조원의 자금이 경영권방어에 투입된 것이다. 만일 이 돈의 일부 혹은 전부가 국내 투자로 연결됐더라면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따라서 대기업 개혁은 일관성 있게 추진하되, 외국 자본의 공격력에 대한 국내 수비수의 방어력을 유지시키는 차원에서 대기업 집단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조치를 일단 유보하는 것이 타당하다. 외국 자본의 공격 여부를 좀 더 지켜보고 국내 수비수의 방어력 강화 전략도 시간을 갖고 검토한 뒤 이들 조치와 병행해 도입해도 절대로 늦지 않다. 외국 투기자본의 창이 워낙 날카로워 방패를 더 두껍게 해도 시원찮을 판에 창은 절대로 안 날아올 것이고, 날아와도 방패가 절대로 뚫리지 않을 것이라며 방패 두께를 줄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방패가 얇아지고 나서, 실제로 창이 날아오고 방패가 뚫린다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윤창현 명지대 무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