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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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탁구공 크기에 무게 7~8g인 안구(눈알)는 하루에 약 10만번 움직이며, 눈꺼풀은 5천번 가량 깜박인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라는 속담은 거의 사실이다. 인간이 외부에서 얻는 정보의 80%가 눈을 통하기 때문이다.
외부 정보 대부분이 눈으로 들어온다지만, 인간은 그에 못지 않은 비중의 '진심'을 눈을 통해 외부에 송신한다. 눌변(訥辯)도 눈빛이 전하는 진심을 거스르지 못한다. 침이 마르게 거짓말을 해대는 입도 눈빛만은 감추지 못한다.
지중해 주변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악마의 눈'을 믿어 왔다. 악마의 눈을 가진 사람은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남을 불행하게 하거나 자연재해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오쿠루스 파시누스'라고 불리는 악마의 눈을 물리친다며 곳곳에 여신 네메시스의 조각상을 세웠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지금도 선천적으로 악마의 눈을 갖고 태어났다는 '제타토리(Jettatori)'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다.
한 아프가니스탄 여인(사진)의 눈을 보자. 언뜻 보아도 공포와 고통에 질려 있다. 외부에 대한 짙은 불신이 가득하고, 아예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비극을 보아 버린' 눈동자다.
아프가니스탄에 살던 소녀는 옛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고향 마을이 소련 헬기의 공격으로 불바다가 되자 파키스탄으로 피난갔다. 사진은 1983년 난민캠프를 찾은 유명 사진작가 스티브 매커리가 찍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지 85년 6월호 표지에 실린 소녀의 표정은 전세계를 전율케 했다.
지난 3일자 영국 옵서버지는 이제 30대 초반이 된 소녀의 이름이 '알람 비비'라고 전하면서 "비비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추정되는 서양인들을 피해 두 아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소녀는 친소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해 토라보라 지방에 살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공교롭게도 이웃에 살던 테러 용의자 오사마 빈 라덴의 딸도 그녀의 제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비의 가족은 미국인들이 비비를 신문하거나 쿠바(미군기지)로 이송할까봐 두려워한다"고 옵서버는 전했다.
두 아이까지 딸린 비비의 혹한기 유랑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녀의 눈에는 모든 분쟁 당사자들이 '악마의 눈'으로 보일 것이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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