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제2부 薔薇戰爭 제1장 序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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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엔닌이 기록한 것처럼 '장보고가 처음으로 지은 절'이었던 적산법화원에서는 겨울과 여름에 두번 강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강회는 모두 신라의 말과 신라의 양식에 따라서 거행되었는데, 겨울철에 있었던 강회에 대해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개성 4년(839) 11월 16일.
적산원은 이날부터 시작하여 법화경을 강의한다. 내년 정월 15일을 한정으로 하여 그 기간으로 삼는다. 여러 곳에서 온 많은 스님들과 인연있는 시주들도 모두 와서 서로 만난다. 그 가운데서 성림(聖琳)화상은 이 강회의 법주(法主)이다. 그밖에 논의(論義)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승 돈증(頓證)과 승 상적(常寂)이다. 남녀 승속 할 것 없이 같이 사원에 모여 낮에는 강의를 듣고, 밤에는 예불참회하고, 경청하며, 차례차례로 이어간다. 승속 등 그 수는 40여명이다. 그 강경과 예참방법은 모두 신라의 방식에 의해서 행하였다. 다만 저녁과 이른 아침 두 차례의 예참은 또한 당식에 의해서 행하였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신라의 말과 노래로 행하였다. 그 집회에 참석한 스님, 속인, 노인, 젊은이, 존귀한 사람, 비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라사람뿐이었다…."
엔닌의 일기처럼 신라사람들만에 의해서 1년에 두번씩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 강회에서 장보고는 마지막으로 아우 정년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때가 825년으로 장보고가 귀국하기 3년 전 일이었다.
이 무렵 장보고가 세운 절 적산법화원에서는 여름강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름강회는 주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회하곤 했는데, 그 무렵에는 특별한 신라고승 한사람이 초빙되어 신라사람들을 상대로 강설을 열고 있었다.
초빙된 법주의 이름은 낭혜(朗慧)화상으로, 3년 전인 헌덕왕 14년(822) 중국의 사신으로 가던 김흔(金昕)의 도움으로 입당에 성공하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장보고 역시 젊지만 신라 최고의 대덕이라는 낭혜의 소문은 익히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장보고는 직접 자신이 건립한 적산원에서 열리는 여름강회에 참석하여 시방불(十方佛)에 예배하고, 죄과를 참회하는 예참(禮懺)을 올리는 한편 낭혜화상의 강설을 경청하였던 것이었다.
이 무렵 낭혜화상은 3년 동안 중국의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고승 대덕을 만나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행적을 최치원은 낭혜화상의 '백월보광탑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장경(長慶·821~824)초에 이르러 조정사(朝正使) 왕자 김흔이 당은포에 배를 대거늘 함께 타고 가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받았다. 이어 대흥성(大興城) 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서는 화엄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얼굴이 검은 노인이 그에게 '멀리 자신 밖의 사물에서 도를 구하려하기보다 자신이 곧 부처임을 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였다. 대사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닫고서 이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의 마조(馬祖)에게서 심인을 얻었고, 향산의 백상서(白尙書) 낙천(樂天)과는 문학을 얘기하는 사이였지만 대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매우 부끄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 사람을 겪어보았지만 이 신라인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후일 중국에서 선이 사라진다면 곧 동이(東夷)에 가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최치원이 쓴 비문에서처럼 중국에 도착한 낭혜가 처음 찾아간 곳은 지상사(至相寺). 이는 섬서성(陝西省)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화엄종 사찰로 화엄종 2조인 지엄(智嚴·577~654)이 주석하던 곳이었다. 낭혜가 처음으로 지상사를 찾아간 것은 자신이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던 부석사에서 공부하였으며, 바로 의상이 지엄의 수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석사의 사상적인 계통은 지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상사에서 검은 노인을 만난 뒤에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사상을 크게 깨닫고 곧바로 선종 사상 가장 뛰어난 선사였던 마조의 제자인 여만을 찾아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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