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길은 피나는 구조조정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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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4일 저녁 도쿄(東京)의 번화가인 시부야(澁谷). 월요일인데도 술집과 카페에는 손님들이 북적거린다. 연휴인 오는 9~11일 유명 온천이나 관광지의 숙박시설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그런가 하면 지난주 우에노(上野)에서 열린 뉴욕근대미술전은 관람료가 1천5백엔이나 하는데도 입장하는 데만 90분을 기다려야 했다. 기울어가는 일본 경제를 실감할 수 없는 장면들이다. 기업·은행·정부 모두가 큰일이라고 걱정은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론 긴장감이 별로 높지 않다.
무엇보다 정부내에서 개혁작업의 강도에 대한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경제재정상이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경제산업상은 산업보호와 경기부양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민영화나 규제완화에서도 소극적이다. 그때마다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실업대란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고용사정이 더 악화돼야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개혁도 제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 미국계 투자은행의 도쿄지사장은 "한국은 불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지만 일본은 눈만 감고 꼼짝 않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구조개혁 없이는 경기회복 어렵다=전문가들은 부실정리를 통한 금융시장 정상화가 무엇보다 시급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동맥경화'를 치료해야 운동도 하고 근육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지난해부터 구조개혁과 함께 추진 중인 신산업 육성도 은행들이 부실을 털어내고 신규 자금을 대줘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공동통화 창설이나 엔의 국제화도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돼야 가능한 일들이다.
일본 정부는 구조개혁에 성공할 경우 2004년엔 민간소비가 살아나 1.5% 정도의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행 도쿄사무소의 안세일(安世一)부소장은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이 충분할 때 '수술'을 해치우는 것이 바람직한 처방일 것"이라고 말했다.
◇닛산식 개혁 본받아야=부실기업 닛산자동차를 2년 만에 회생시킨 카를로스 곤 사장의 개혁이 모범답안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는 취임 첫해 무려 6천8백억엔의 적자를 내면서도 감원·공장폐쇄 등 가혹한 개혁작업을 펼친 끝에 지난해 9월 상반기 결산 때 1천9백억엔의 영업이익을 냈다. 고통이 심한 개혁일수록 빠른 회복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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