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1> 제99화 격동의 시절 검사27년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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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현철씨를 청문회장으로 보낸뒤 호텔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생중계를 한다고 벌써부터 시끄러웠다. 金씨가 국회의사당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취재 경쟁이 치열한 것 같았다.
국회의사당 출입문 유리창이 깨지고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당초 예상보다 청문회는 차분하게 진행됐고 김현철씨도 어느 정도 성실하게 답변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김현철씨가 호텔로 돌아왔다. 긴장과 피곤이 겹쳤던지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꼬리곰탕으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오후 청문회에 대비하기로 했다.
金씨 뒤를 따라온 취재진들이 호텔 방문을 막무가내로 열고 들어오려고 야단이었다. 수행원들의 제지로 기자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잠시 후 미리 시켜놓은 꼬리곰탕이 들어왔다. 김현철씨와 나, 그리고 김무성 의원 셋이서 점심을 함께 했다.
그런데 밖의 기자들이 "사람은 두 사람이 들어갔는데 식사는 3인분 이 배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사람이 안에 더 있다"고 자기들끼리 시끄럽다. 역시 기자들의 감각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니까 당시 여권의 실력자인 崔모 의원의 비서라는 사람이 머리에 커다란 붕대를 감은 채 들어왔다. 아침에 일어난 소동에서 머리를 다쳐 치료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金씨는 나에게 "오전에 보시니까 어떻더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잘 대처했다"는 대답과 함께 "오전에 느낀 점을 메모해 두었으니 읽어보고 오후에 대비하라"며 쪽지를 주었다.
오전에 답변을 잘 했다는 것과 의원들이 질문할 때 너무 자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질문취지에 동의하는 식으로 비치거나 건방지다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는 견해를 적었다.
특히 야당의원의 질문에는 답변을 더욱 천천히 신중하게 하고 답변은 되도록 단답형으로 해 논쟁에 말려들지 말라는 등의 주의사항도 포함시켰다. 곧 이어 배재욱 비서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개를 자주 끄덕이는 것에 대해 나와 같은 의견이었으며 오전의 청문회는 아주 성공적이라는 말도 했다.
그날 청문회는 별다른 실수 없이 잘 끝났다. 다음날 대부분의 신문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은 듯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가 침착하고 겸손했으며 전반적으로 잘 대처했다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청문회가 끝난뒤 김현철씨와 나는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헤어졌다.
1997년 5월 12일 청와대 문종수(文鍾洙)민정수석과 사직동 한식집에서 점심을 했다. 청문회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끝나서 대통령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대검 중수부가 김현철씨를 소환조사할때도 변호를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내가 청문회에 자문을 해줄 때 이권개입이나 금품수수 여부에 대해 몇차례나 김현철씨에게 확인했을 때 그 사람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 검찰은 나름대로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신병처리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형사사건까지 맡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이유도 설명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文수석은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으나 난처한 입장인 것 같았다.
5월 14일 대검에 출두하기로 된 김현철씨는 하루 전날 나한테 3~4회에 걸쳐 전화를 했다. 그는 내가 자기의 변호를 맡아줄 것으로 확신하는것 같았다. 관련자들이 검찰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는 등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내용에 대한 설명을 했다.
文수석도 金씨 사건을 맡아 달라고 다시 전화를 했다. 당시 심재륜(沈在淪)중수부장과 주임검사였던 이훈규(李勳圭)중수부 3과장은 모두 나와 각별한 후배들이다. 내가 그 사건의 변호인으로 나서면 서로 입장이 난처해 질 것이 뻔했다. 내가 변호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자 이들은 물론 다른 대검 간부들도 한결같이 "잘 하신 처사"라고 말했다. 결국 김현철씨는 대검 중수부에 의해 구속됐다.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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