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 脫北의사 中서 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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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과의사 출신의 탈북 귀순자가 북한에 두고 왔던 딸과 손녀를 서울로 데려오려 출국했다가 지난달 말 중국 공안당국에 딸 모녀와 함께 체포·억류된 것으로 4일 밝혀졌다.
북한 국적의 딸 모녀는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가능성이 커 이를 막기 위한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절실하다.
◇억류 경위와 정부 대응=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1997년 귀순한 김재원(金材元·64)씨는 탈북한 뒤 중국에서 숨어지내온 딸 인순(36·가명)씨와 손녀(8)를 서울행 비행기에 태우려다 지난달 26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공항에서 체포됐다.
중국 공안당국은 金씨의 딸이 위조 한국여권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이들을 연행, 현재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옌지(延吉)시로 이송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탈북 인사는 "金씨는 귀순한 뒤 의사로서 겪은 북한체제의 인권유린 사례를 증언하는 등 반북활동을 벌여 북한이 신병인도에 적극 나설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등 관계당국은 金씨의 체포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족의 신고를 받고서야 사태 파악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정부의 귀순자 신변관리와 재외국민 영사보호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측과 접촉 중이지만 아직 조사결과를 통보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金씨 가족의 탈북 유랑=중국 지린성에서 출생한 金씨는 75년 신의주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신의주시 낙원기계연합기업소에서 30여년간 의사로 근무했다.
경제난으로 북한체제에 염증을 느낀 金씨는 96년 부인과 중국으로 탈출, 홍콩을 거쳐 97년 3월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함께 탈북했던 아들은 중국 당국에 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부모의 탈북 뒤 고초를 겪던 딸 인순씨도 97년 말 중국으로 나와 서울에 정착한 부모와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한국행 길이 막혀 4년 넘게 동북3성 지역을 떠돌아야 했다.
북한에서의 의사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金씨는 월 50만원의 영세민 지원금으로 임대아파트에서 근근히 살아 왔다. 한때 탈북자 정착시설인 하나원의 생활지도관으로 일했지만 퇴직 후 쪼들렸다.
그렇지만 金씨 부부는 딸에게 매달 생활비와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손녀의 학비를 부쳐왔다.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金씨가 '죽기 전에 딸과 손녀를 데려와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며 "돈이 궁해 현지 브로커를 쓰기 어렵자 지난달 9일 직접 중국으로 갔다가 체포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울에 남은 金씨의 부인 최영주(崔英珠·63)씨는 "정부에서 잘 해결해 주겠다고 해 믿었는데 아직 아무런 답이 없다"면서 "불쌍한 우리 가족의 생이별을 막아달라"고 울먹였다.
崔씨는 남편·딸과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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