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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아는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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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들의 결혼식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가 겹친다면, 아들 결혼식은 비디오로 보겠다.” 가족에게서 버림받기 딱 좋을 성싶은 이 철없는 발언을 한 사람은 영국 작가 닉 혼비다. 축구팬들에게 『피버 피치(Fever Pitch)』라는 축구 에세이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

그는 영국 프로축구팀 아스널의 광(狂)팬이다. 소년 시절부터 “(아스널의) 경기가 있는 날 아침이면 속이 메슥거리다 두 골 차이로 앞서 나갈 때쯤 겨우 괜찮아지는” 증세에 시달렸다. “축구는 나를, 아내가 어느 순간에 아이를 낳는다 해도 병원에 함께 가지 않을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한때 아스널이 FA컵 결승전을 치르는 날 하필 아이가 태어나는 광경을 상상하던, 이 못 말리는 축구광의 고백이다.

혼비 같은 남자를 멋지다고 생각할 여자는 드물다. 스포츠에 대한 남자의 지나친 몰입은 남녀의 소통 단절을 불러오기 일쑤다. 특히 월드컵 시즌은 남자와 여자의 취향 차이가 집단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다. 축구를 ‘비열한 개싸움’이라고 멸시했던 네덜란드 학자 뵈이텐디예크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많은 여성은 아직도 축구를 ‘22명이 공 하나에 매달려 90분간 몰려다니는’ 일로 여긴다.

소통 단절은 한쪽의 소외를 낳는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유럽에 등장했던 ‘월드컵 과부(worldcup widow)’가 그것이다. “그냥 과부는 유산이라도 물려받거나 남들의 동정이라도 사는데, 월드컵 과부는 그런 것도 없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다. 월드컵 과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낚시 붐과 더불어 사회적 이슈가 됐던 ‘일요 과부’보다 고약하다. 낚시는 남편 혼자 갔지만 축구는 아들까지 한통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축구를 좋아하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여성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은 커져만 간다. 여성 스포츠 MC 이은하가 쓴 『축구 아는 여자』의 추천사에서 아나운서 김성주는 “남자들은 군대 가서 축구 한 얘기에 공감하는 여자에 열광한다”고 했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공 인아처럼 아이를 낳으면 ‘지단 넘버원’이라는 뜻에서 ‘지원’이라고 짓겠다는 여자 말이다. 남아공 월드컵이 나흘 후면 개막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를 알자’는 책이 쏟아지고, 문화강좌도 개설됐다고 한다. 대상은 대개 여성이다. ‘축구 아는 여자’가 되자는 캠페인이라고나 할까. ‘광(狂)’과 ‘과부’의 타협점이 찾아진다면 축구 좀 아는 여자가 돼도 나쁠 건 없지 싶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