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문신 새기는 심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애정 표시로 상대방 몸에 자기 이름을 문신하는 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유명인은 그 낡은 연애풍속에 충실한 나머지, 기녀의 이름을 팔뚝에 새겼다가 부인에게 발각돼 혼이 나기도 했다.

곽대희의 性칼럼

심한 요도협착증으로 우리 병원을 찾은 한 중년여성도 비슷한 사례로 진료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이 여성은 치료를 원했지만, 사건 현장 접근을 강력히 거부했다. 결국 빈뇨(頻尿) 증세를 견디다 못해 진찰대에 눕게 됐다.

그녀의 국립공원 지대에 ‘내 XX’라는 청색 한글 문신이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남편이 독점욕을 이기지 못해 강제로 새겼다”고 설명했다. 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편의 치기 어린 장난 때문에 신체 곳곳에 화려함을 새긴 여성을 자주 봤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성행했다. 예전 일본 오사카의 요쓰바시(四橋)를 방문했을 때, 한 레이저 클리닉에서 30대 여성이 엉덩이에 있는 문신을 지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문신은 발기한 페니스가 붉은색 하트 모양을 관통한 그림이었다. 연애시절 남편이 그린 것이라는데, 외설적인 요소만 제외하면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그 다음 날에는 같은 병원에 한 젊은 여인이 찾아와 유방에 그려진 음화를 지워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의 문신도 남편의 장난이었다. 하지만 유행이라는 것은 한때 성행하다 시들해지는 생리를 가졌다. 몸에 새기던 사랑의 언약도 이제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이런 피부미화가 현대사회에서는 혐오감을 주지만, 과거 미개부족에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린란드에서는 여성이 문신이 없으면 남자를 매혹하지 못한다고 믿었으며 여아가 태어나면 그녀의 유년 시절, 남아가 포경수술을 받는 연령 즈음에 문신을 해야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학자 크란츠의 연구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남성들은 온몸 곳곳에 문신을 하고 다녔다. 신체에 문신이 많으면 강인한 사람으로 존경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턱이나 윗입술, 이마에는 절대 문신을 넣지 않았다. 이 부위는 추장만 할 수 있는, 신성불가침 구역이었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문신이 가장 넓게 쓰인 것은 성인임을 나타낼 때다. 대부분의 부족은 이런 의미로 문신을 했다.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등 남태평양 작은 섬에 사는 부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폴리네시아의 대부분 여성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다는 표식으로 치구에 넓은 활 모양의 검은 줄기 문신을 그려 넣었다. 비스마르크 군도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치구에 붉은색 활 모양의 줄기 문신을 새기고 다녔다.

캐롤라인 군도의 포나페 섬, 사모아 섬의 여자들은 하복부에 넓은 띠 모양의 문신을 새기고 다녔다. 이 문신은 남성에게 여성을 강조하기 위한 광고판 같은 것으로 ‘섹스가 가능한 연령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랫동안 남방 민족을 연구해 온 J S 쿠바리 박사는 한 보고서에서 ‘남방 민족의 치부는 문신으로 소중하게 숨겨져 있으며, 그림은 대음순과 질까지 달할 정도로 넓었다’고 성기 화장의 훌륭함을 전하고 있다.

그는 “남방 민족은 선천적으로 치모의 발육상태가 나쁘고 숱이 적어 제2차 성징의 표시가 현저하게 결여된 결함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분석했다.

또 이 보고서에는 팔라우 섬에 사는 부족 처녀들은 첫 섹스 상대에게 치구 문신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나도 성숙한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성기에 문신을 새김으로써 대체했다고 한다. 또 성인이 됐다는 표식과 더불어 남자의 사랑을 획득했다는 자랑의 표지이기도 하다.

문신은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사랑의 장난은 줄었지만, 자신의 몸에 해괴한 그림이나 글씨를 써 넣는 것을 쉽게 용납하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곽대희비뇨기과 원장

<이코노미스트 945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