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한·일협정 반대 시위 격화…정부, 계엄령 선포로 맞대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벌이다 붙잡혀 ‘닭장차’에 실려가는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사진]

박정희 정부는 1964년 6월 3일 오후 6시30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 검열, 대학휴교 등을 선언했다. 비상계엄령은 64년 봄 시작된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시위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언론인 등 112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6·3사태 후 5개월이 지난 11월 3일 ‘6·3 동지회’가 결성되었는데, 초대 회장에는 이명박 현 대통령, 2007년에는 이재오 현 국민권익위원장이 회장을 맡았다.

비상계엄령은 당시 박정희 정부와 미국이 느끼고 있었던 위기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학생들이 정권을 붕괴시키는 걸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유엔군사령관은 합법적으로 수립된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이동을 허가할 수도 있지만, 만약 ‘친미’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 정부를 붕괴시킨다면 이를 승인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야당은 미국이 이 기회에 박정희 정부를 교체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야당이 새로 수립될 정부의 내각 명단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관 문서는 야당의 무책임함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고, 한·일협정의 조속한 체결이 당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핵심적인 사안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미국은 결국 ‘귀찮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보다는 독재를 참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시위를 막기 위해 군대의 동원을 승인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표적이 되고 있었던 김종필을 정점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3년간 대부분의 문제는 김종필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미 군사정부 시기부터 주한 미국대사관은 군사정부의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김종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룹으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김종필은 6·3사태 직후 두 번째 외유를 떠나야 했다.

결과적으로 비상계엄령으로 시위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고, 이듬해 한·일협정 체결이 이뤄졌다. 미국은 6·3사태를 통해 조속한 시일 내에 한·일협정을 체결한다는 대한정책을 관철했고, 권력의 정점에서 김종필을 끌어내리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이후 한국 정부 내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견제할 세력이 결여되므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강화를 초래했고, 이후 한·미 간의 갈등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