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류들의 24시] 9. 독일 BMW 부사장 볼프강 슈타들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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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고급차의 대명사로 통하는 BMW. 흰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BMW의 엠블럼(기장)은 독일 기술력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술개발이 오늘의 BMW를 있게 했다. 장인(匠人)을 '마이스터'로 부르며 존경하고 우대하는 독일. 그 중에서도 BMW의 기술자들은 '자동차에 관한 한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먹고 산다. BMW가 자랑하는 마이스터를 만났다.

오전 5시30분. 볼프강 슈타들러(44)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수북이 쌓인 조간신문의 자동차 섹션부터 빠르게 훑는다. 커피를 곁들인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눈길은 줄곧 신문에 난 신차 동향에 꽂혀 있다.

오전 7시. 출근을 서두른다. 그가 사는 딩골핑과 그의 직장인 BMW 연구소가 있는 뮌헨은 1백20㎞ 떨어져 있다.

'애마(愛馬)' BMW 318i의 시동을 건다. 몸을 감싸는 잔물결 같은 진동이 어제와 어떻게 다른지 살짝 눈을 감고 세심하게 비교해 본다. "소비자들이 아침마다 '상쾌한 BMW'라는 느낌을 갖도록 차를 만드는 게 제 일이죠."

출근길엔 운전만 하는 게 아니다. 자동차 전시장이자 경주장 격인 아우토반(독일의 고속도로)을 달리는 한시간은 BMW와 생생한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다. 엔진소리와 진동,눈길이나 빗길에서의 제동 능력을 하나하나 체크한다. 다른 차들도 관찰대상이다. 함께 달리는 자동차의 뒷모습,옆모습을 건성으로 넘기지 않는다.

"출.퇴근 운전길은 영감(靈感)을 줍니다. 아이디어가 활기를 찾는 시간이지요."

연구소에 도착하면 오전 8시. '자동차와 하나된 삶'의 또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는 BMW 연구개발센터(FIZ)의 실험자동차 제작팀 부사장이다.

제작팀은 5천여명 연구인력 중 정예 6백여명으로 구성된 '드림팀'이다. 새 기술을 적용,실험자동차가 만들어지면 본격 생산을 앞두고 최종 테스트를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신차 개발팀은 슈타들러의 입에서 "노(No)"라는 말이 떨어질까 그를 저승사자 보듯 하며 긴장한다.

슈타들러는 명문 뮌헨공대 기계과 졸업후 3년간 생산라인에 있었을 뿐 18년째 연구소를 떠난 적이 없다. 자동차에 대한 그의 철학은 BMW의 '사시(社是)'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BMW의 철학은 '타는 즐거움'입니다. 편안한 승차감과 멋진 외양도 중요합니다. 또 튼튼하고 안전해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빨라야 합니다."

그는 지나치듯 "'배기량이 같으면 BMW가 빠르다'는 말을 들어봤느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속설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게 바로 BMW의 기술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라며 은근히 목소리에 힘을 줬다."BMW의 명성은 무한속도의 경쟁터인 아우토반에서 살아남은 데 대한 월계관"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과시간에 그는 실제로 아우토반에서 경주하듯 몸을 부딪혀가며 일을 한다. 부사장의 직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종일 주행연습장에서 실험용 자동차를 직접 운전한다. 실험팀의 다른 연구원은 "시제품당 평균 10만㎞ 이상을 달려본 뒤에야 결론을 내려준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고객을 끌어들이는 비결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철저한 시험주행을 통해 기술개발팀과 마케팅팀에 조언을 해줌으로써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과 시장성을 미리 점검할 수 있다는 논리다. "구체적 성과를 들어보라"고 요구하자 일일이 다 기억을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전세계 자동차 기술은 평준화돼 가고 있어요. 우리는 경쟁사와 마지막 5%의 격차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벤츠라는 최고의 맞수 때문에 방심은 금물입니다."

'마지막 5%'를 향한 무한경쟁을 위해 그는 오래전 매니어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 일반직원들의 하루 근무시간은 7시간. 토.일요일을 빼면 주당 35시간 근무다. 출근시간이 오전 8시여서 오후 3~4시쯤 되면 연구소는 텅비게 된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견인차인 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회사에서만 하루 10시간 이상 일한다. 한 주에 60시간 넘게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직원들의 퇴근시간이 그에겐 새로운 출근시간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 적막감이 묻어나는 시간,그는 매니어 세계의 문을 연다. 타사 기술개발의 동향을 살피고 구상을 가다듬는 그만의 시간이다. 전문잡지를 읽고 메모도 한다. 보통사람에겐 그냥 스쳐지나갈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는다. 현장검사에서 느꼈던 문제도 되짚어본다. 어느덧 땅거미가 진다.

출근길을 거슬러 집에 도착하면 대개 오후 8시. 식사 뒤 그는 또 자동차의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인터넷과 방송.전문잡지를 뒤지고 그날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점검한다.

당연히 의문이 생겼다. 그는 왜 이토록 열심일까.'마이스터'가 다른 신경 안쓰고 일만 할 수 있도록 철저하고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회사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연구소는 자동차의 설계부터 엔진 및 부품개발.소재연구 등 모든 BMW 기술의 요람입니다. 매출액의 5~6%가 연구소에 투자됩니다."하이케 뮐러 홍보실 직원의 소개다. 넉넉한 연구.개발비가 연구소 인력들에 대한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보장해준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독일인들이 대개 그렇듯 슈타들러도 돈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린다. 홍보실을 통해 슬쩍 알아보니 그의 연봉은 평균 20만 유로(약 2억3천만원). 이 정도면 독일에서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회사가 돈 걱정 않고 일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의미다.

"회사가 받아준다면 65세까지 일하고 싶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지요."'마이스터'란 이런 것일까.

요즘 슈타들러의 관심은 미래로 향해 있다. "환경 친화적이면서 BMW의 모토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클린카'의 개발에 신경을 쏟고 있습니다. 수소차 부문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그에게서 진정한 독일 '마이스터'의 표상을 보는 듯했다.

뮌헨=유재식 특파원

*** BMW는 어떤 회사

BMW는 1916년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항공기 제작 회사로 처음 출발했다. 23년 오토바이 생산으로 잠시 외도했다가 자동차 업종에는 28년 발을 들여놓았다.

경쟁사인 벤츠.아우디.오펠 등에 비해 출발이 한참 뒤진 셈이다. 그러나 후발주자의 약점을 '빠른 차 개발'전략으로 극복하면서 명차의 반열에 '빠르게'합류했다.

특히 36년 개발한 스포츠카 328 모델은 각종 자동차 경주대회를 휩쓸었다. 40년 당시 가장 길고 험한 레이스인 이탈리아 밀레 밀리야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결정적으로 성가를 높였다. 56년엔 최고시속 2백20㎞의 507 모델을 개발했다.

'빠른 자동차'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BMW가 추구하는 모토다.

회사 규모는 크지 않다. 생산대수로 따져 독일 내 다른 자동차 메이커인 폴크스바겐은 물론 벤츠.오펠(GM 자회사)에도 뒤진다. 2000년 총 생산대수는 83만대로 한국의 현대차에도 못미친다.

그러나 수익성이 좋다. 라이벌 벤츠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뒤 '벤츠로 돈 벌어 크라이슬러에 쏟아붓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전하고 있지만 BMW는 2년 연속 흑자를 냈다. 2000년 10억유로(약 9억달러)의 순익을 기록했고, 지난해 3분기까지는 12억유로(약 10억8천만달러)의 순익을 냈다. 때문에 대부분의 자동차 업체가 감원에 나설 때 이 회사는 3시리즈 공장을 신축하는 등 오히려 공격 경영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을 늘려도 대중차 이미지는 철저히 배격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초소형차(미니)부터 최고급 리무진(2003년부터 소유권이 넘어오는 롤스로이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급의 자동차를 생산하면서도 '프리미엄 카 메이커'로 남겠다는 게 BMW의 전략이다. 수소차 개발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미래차로 개발한 수소차는 실험 단계를 지나 2000년 5월 세계 최초로 시판에 들어갔다. 750hL이 그 주인공이다.'하노버 엑스포 2000'엔 셔틀 차량으로 제공돼 10만㎞ 무사고 주행기록을 세웠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백㎞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9.6초. 최고 시속은 2백26㎞여서 휘발유차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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