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희의 노래누리] 무대설땐 한국인 군대 갈땐 미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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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배창호 감독의 1985년 영화 '깊고 푸른 밤'을 기억한다. 미국으로 위장 이민한 인생 낙오자 백호빈(안성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 시민권을 얻고 싶어하는 자다.

한국에서 실패한 인생의 반전을 꿈꾸며. 아메리칸 드림이다. 흑인과 결혼해 이미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제인(장미희)은 돈을 받고 그런 백호빈과 위장 결혼을 해준다. 그러면 백호빈은 시민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장면. 백호빈은 위장 결혼을 의심하는 미국 판사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안되는 영어로 화장실에서까지 연습한 노래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불러댄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하지만 관객들은 백호빈을 미워할 수 없다. 영화는 쓰고, 처연하고, 비참하지만, 조국을 버리려는 그의 꼬인 인생은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스물 여섯살의 한국 남자 유승준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백호빈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판사 앞에서 "나는 미국인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와 비난 여론을 '정면 돌파'하겠다고 한다.

어떤 한국인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세계화 시대에 그런 선택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다. 오히려 잘 되기를 빌어주는 게 우리 한국인들이다.

왜 유승준이 문제인가. 그는 백호빈과 다르다. 한국은 그에게 엄청난 부와 영화를 안겨준 조국이다. 그런 그가 순전히 '군대에 가기 싫어' 한국 사람임을 부정했다.'군대에 가겠다'고 공언하며 쌓은 이미지로 인기와 부를 누리고서 말을 뒤집은 것이다.

가족이 미국에 있다고 하지만 어엿한 성인이며 이미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그가, 군대에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했겠는가.

그가 미국 진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그가 미국 무대로 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가능성도 없다. 그러니까 결국 수십억원의 돈을 벌고 인기를 누리는 한국인으로는 살고 싶지만, 군대에 가야 하는 보통 한국인은 'No thanks!'라는 얘기다. 바로 그 점이 기가 막히는 것이다.

좋다. 그것도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자. 다만 한가지. 지금 이 시간에도 한반도 구석 구석에서 칼날 같은 추위에 떨며 때로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젊은 군인들, 한국에서 살아야겠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의무 복무 중인 우리의 평범한 아들과 동생과 형과 오빠들이, TV에 버젓이 출연하고 계속 큰돈을 버는 유승준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두려울 뿐이다.

유리할 땐 한국시민이고 불리할 땐 미국시민인 사람을 옹호하면 열려 있고 세계화된 마인드의 소유자일까. 그런 세계화는 사양하고 싶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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