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1% 북한 지원에 쓰자] 국회내 통일논의기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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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예산 1%의 대북지원은 북한에 근본적인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한반도 평화를 공고히 하자는 게 기본취지다.'햇볕정책'의 보다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확대판인 셈이다.

햇볕정책에 토대를 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북한의 약속위반에 대한 미지근한 대응을 비롯해 ▶국민적 동의 결여▶계획적이고 치밀한 청사진 미비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예산 1%의 대북지원이 가능하기 위해선 몇가지 디딤돌이 필요하다.

◇ 북한은 약속사항 이행해야="행정적 이유 때문에 합의서를 교환할 수 없게 됐습니다. 변화된 일정을 차후에 통지하겠습니다."

지난해 2월 11일 북한 군 당국은 판문점 직통전화를 통해 이같은 내용의 전문을 남북 군사실무회담 남측 수석대표인 김경덕 준장 앞으로 보내왔다. 남북은 6개월여의 협상 끝에 같은해 2월 8일 열린 실무회담에서 경의선(京義線) 철도.도로 복원공사를 위한 비무장지대(DMZ) 내 남북한 군사적 보장에 관해 의견일치를 보고 양측 국방장관의 서명을 받아 14일 합의서를 교환, 발효키로 했다.

그러나 발효 3일 전에 북한이 이를 일방적으로 철회한 것이다.

이처럼 북한이 합의사항을 깬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해 9월 본사 창간기념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3.4%는 '남북관계가 상호주의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따라서 예산 1%를 대북지원에 쓸 경우 이런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기존 합의사항을 파기하는 행위를 되풀이한다면 대북지원은 어려워질 게 뻔하다.

김영윤(金塋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엄격한 상호주의를 적용할 수는 없으나 대북지원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피하려면 북한 당국에 '대가없는 지원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북측이 취해야 할 화해조치=우리측 요구의 핵심은 평화정착이고,이는 군사적 신뢰구축에서 시작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구체적으론 남북 군사직통전화 설치를 비롯해 ▶대규모 군사훈련 상호참관▶대규모 부대이동 상호통보▶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남북 군사상설기구 설치 등이 있다.

문정인(文正仁) 연세대 교수는 "북한도 90년 5월 발표한 군축제안에 신뢰구축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 대목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한 당국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군사 직통전화 설치와 부대이동 상호통보가 이뤄져야 신뢰구축 단계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정착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분야 교류 확대에도 북한은 적극 나서야 한다. 남북간에 합의됐으나 이행되지 않고 있는 투자안전보장합의서 등 경협 관련 4대 합의서의 실천과 경의선 복원공사 본격 착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해결 등 인도적 문제에서 북한이 진취적 자세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최소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및 서신교환, 송금허용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92년 2월 발효되고도 북측의 이행거부로 사문화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되살려 여기에 담긴 내용을 북한측이 이행토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송영대(宋榮大)전 통일부 차관은 "기본합의서에는 남북 평화공존을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반대급부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며 "기본합의서 실천을 예산 1% 대북지원의 조건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지원에 대해 북한이 상응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판단했을 경우 이를 어떤 방식으로 교환하느냐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를 종합해 보면 공통적인 대목이 있다.

남북한 경제력 차이를 반영한 '비등가(非等價)'와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고 한반도 평화 및 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비대칭(非對稱)' 방식을 적용하자는 게 그것이다.

또 우리측이 먼저 지원한 뒤 북측의 화해조치가 이어지는 '비동시성(非同時性)'을 추구하되 사안에 따라선 쌍방이 동시에 주고받는 방식을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윤덕민(尹德敏)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대북지원을 할 때마다 반대급부를 내걸면 지원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평화정착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시급하고 결정적인 내용들은 대북지원의 반대급부로 적시에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 국민적 합의 도출=정부차원의 대북지원이 청사진대로 탄력을 받아 진행되고 약효가 제대로 나타나려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민의 혈세(血稅)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은 물론 김대중 정부도 대북지원을 국민적 여론수렴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대북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퍼주기' 논란에 휩싸였고, 대북정책 추진에도 걸림돌이 돼버렸다.

실제로 '대북지원은 국민 여론을 감안해 집행할 것'이라던 통일부는 2000년 9월 제주에서 열린 3차 장관급 회담 기간 중 9천만달러 규모의 50만t 대북 식량지원 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정부가 근거로 제시한 것은 이틀 동안 1천명을 상대로 벌인 대북지원 여론조사 결과(찬성 55.3%, 반대 42.6%)뿐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지난해 예산의 0.017%인 1백30억원을 지원하고도 엄청난 대북지원을 한 것처럼 부풀려진 배경에는 국민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잘못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북지원 프로그램을 제시한 후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대신 대북 비밀협상과 한건주의식 지원으로 스스로 발목을 묶어버린 측면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서주석(徐柱錫) 한국국방연구원 북한군사연구팀장은 "정치권과 국민.언론 사이에 대북접근의 전략적 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면서 "국회의 동의를 얻고 토론회 등을 통한 선순환 과정을 거쳐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예산 1%의 대북지원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국민 합의에 기초한 초당적 대북정책을 강조한다.

허문영(許文寧)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여야가 민족문제를 정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면서 일정 부분 공감대를 형성해야 국민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석열(柳錫烈)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국회에서 초당적 기구를 만들어 대북지원의 마스터 플랜을 짠 후 여야가 합의하는 게 국민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특히 DJ정부 임기의 사실상 마지막인 올해가 정권교체와 무관한 중.장기적 대북접근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느냐를 가름할 중요한 시기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철희.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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