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진보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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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얼마 전 ‘천안함 전문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대표가 산소용접기로 유성매직의 ‘1번’을 없애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어뢰 피격을 못 믿는 쪽은 신기한 마법에 또다시 환호했다. 잠시 초등학교 4학년 과학교과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뜨겁지 않은 촛불’이란 단원이 있다. 1400도의 촛불에 손가락을 빠르게 지나쳐도 화상을 입지 않는 이유를 배운다. 열 전달은 두 물체의 온도 차이와 함께 접촉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어뢰가 터질 때는 순간적이다. 1초도 안 된다.

이 대표는 산소용접기로 한참 가열한 뒤에야 ‘1번’을 지웠다. 초등학생 눈에도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실험이다. POSCO 관계자는 “2000도가 넘는 산소용접기로 계속 가열하면 유성매직뿐만 아니라 강철까지 녹아 내린다”고 말했다. 1500도가 넘으면 쇠도 녹는다.

최근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미국 버지니아대 물리학 교수의 분석을 공개했다. “어뢰가 폭발했다면 ‘1번’ 글씨는 타버렸을 것”이란 내용이다. 다음 날 이승헌 버지니아대 물리학 교수가 “‘1번’에 대한 과학적 의혹을 제기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이 주장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궁금했다. 젊은 과학도들의 토론장인 POSTECH(옛 포항공대)의 브릭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이 교수의 주장이 맞다는 과학도는 많지 않다. 대부분 반박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1번’은 탄두에서 5m 이상 떨어진 데다, 어뢰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터졌다. 폭발 충격으로 추진체가 튕겨나간 것을 감안했느냐는 반문도 눈에 띈다. “그냥 열 전달이 다 됐다고 가정하고 계산한 느낌”이라며 “어뢰가 폭발할 경우 각 부품의 운동궤적, 분리 속도부터 시뮬레이션해 놓고 열 전달을 계산했는지 궁금하다”는 반박이 압도적이다. 오히려 “글씨 주변의 은색 페인트가 온전한 만큼 ‘1번’도 온전할 수 있다”는 국방부 해명에 머리를 끄덕이는 분위기다.

국제사회는 대부분 천안함 합동조사 결과를 인정하고 있다. 중립국인 스웨덴까지 참가했다. 러시아 조사단의 판단이 남아 있지만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도 “한국의 공동조사를 매우 중시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의 28%는 여전히 천안함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 정치적 언어로 난도질당하면 완벽한 증거물과 국제사회의 상식도 먹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진보진영이 과학과 국제 흐름에 담을 쌓고 있는 셈이다.

광우병 사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과학자가 ‘1억분의 1’의 확률은 무시할 수 있다는 쪽이었다. 국제사회도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유독 국내 진보진영만 광우병 공포를 부추겼다. 이런 이상한 그림이 천안함 사태까지 연속되고 있다. 보수진영이 과학과 국제공조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진보진영은 비과학적 가설에 기대고 국제적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구도가 굳어지면 진보진영은 얼마 못 가 밑천이 바닥난다. 무덤 속의 마르크스가 통탄할 일이다.

한때 일본 사회당은 강력했다. 그 사회당이 현실에서 발을 빼고 이념에 집착하면서 자멸했다. 국제변화에도 둔감했다. 인적자원이 순식간에 한계를 드러내고 지지기반은 붕괴됐다. 건강한 사회는 양쪽 날개로 난다는 게 상식이다. 광우병·천안함 사태로 이런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보수 대(對) 진보의 구도는 영원할 거라고? 글쎄다. 사회당 몰락 이후 일본은 보수 양당 체제로 확 바뀌어 버렸다. 우리도 일본 꼴 날까 걱정된다. 참고로, 1996년 사회당이 흔적 없이 사라진 뒤 일본의 성장도 멈췄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