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머뭇거리는 야당의 정당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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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년 기자회견에서 "집권하면 대권과 당권을 분리하겠다"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선언은 시대 흐름에 비춰볼 때 당연하다.'대통령=당 총재'라는 권력집중 풍토가 정치개혁의 장애물이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없애야 한다'는 다짐은 시대 흐름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당 대선 후보 선출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총재를 그만두고 권한대행체제로 가겠다"는 구상은 일단 진전된 내용이다.

그러나 李총재의 발언은 원론적 약속 정도로 비춰진다. 대통령 후보와 당권을 나눠야 한다는 '제왕적 총재 극복론'을 일축했기 때문이다. '제왕적 총재'문제도 '제왕적 대통령'처럼 1인 보스정치의 어두운 유산인 만큼 야당식 권력 분리를 해야 한다는 게 당내 비주류의 요구다. 李총재의 거부 이유는 "야당은 여당과 다르며, 총재와 대선 후보를 함께 하는 게 대선 승리에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李총재의 구상은 전당대회 전에 총재직을 대행에게 잠시 넘기고, 후보로 뽑히면 다시 총재직을 맡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분리 선언은 대통령이 될 경우 실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공약수준일 뿐이다.

李총재의 이런 입장은 야당을 꾸려가는 어려움과 선거 전략의 고심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당내 민주화보다 정권교체가 우선한다"는 게 李총재의 주류측 설명이다.

그렇지만 정당 민주화 쪽의 과감한 변신보다 '이회창 대세론'이 상처날까 일사불란(一絲不亂) 쪽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지적에서 벗어나려면 당내 공정 경선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부정부패에 대해 "권력이 국가기관을 사유화해 법 위에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며, 부패의 심각성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현실인식에 실망했다"는 李총재의 발언은 야당 총재로서 적절한 지적과 개탄이다.

그러면서 성역없는 부패척결을 위한 수단으로 특검제의 도입을 촉구했다. 그러나 특검제 도입은 '이명재 검찰총장 체제'출범을 환영.기대하는 대변인의 성명이 나온 지금으로선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회견 내용 중 "선거의 조기 과열과 타락한 돈선거로 경제가 멍들지 않도록 하겠다"는 부분은 확실히 실천에 옮겨야 한다. 올해 큰 선거 탓에 경제가 엉망이 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이 경제계에 깔려 있다. 이런 걱정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돈 안드는 선거의 예측 가능한 틀을 마련해야 한다.

李총재는 당내 유력한 대선 후보이자 거대 야당을 끌고 가는 총재다. 그런 측면에서 국정 혼선을 막기 위한 끊임없는 대안 제시에 나서야 한다.

정치적 반사이익에 안주해선 안된다. 그런 점에서 "경제 문제만큼은 여야가 정쟁을 멈춰야 하고 흔쾌히 협력하겠다"는 초당적인 자세도 빨리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정치를 바로잡고 국정쇄신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통령을 만날 의향이 있다"면 그 성사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이런 주문들을 제대로 소화해야 李총재의 수권(受權)면모를 단단히 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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