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 3700억 들인 6세대 LCD 기술 대만으로 넘어갈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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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최첨단 기술을 외국 기업체로 빼돌리거나 이를 시도한 전직 대기업체 직원들이 검찰에 적발됐다.

검찰 조사 결과 대만.중국 등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떨어지는 외국 경쟁업체들은 국내 업체 관계자들에게 고액 연봉 등을 제시하며 기술 유출을 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위해 외국 기업들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국내 기업들을 물색한 뒤 연구원을 매수하거나, 합작회사를 설립해 기술을 확보한 뒤 계약을 파기하는 위장합작 등의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고액 연봉 유혹에 LCD 기술 유출될 뻔=1993년부터 대기업체인 A사에서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 연구팀 과장으로 근무하던 유모(36)씨는 지난 6월 직장 동료였던 차모(44)씨에게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대만 B사에서 6세대 TFT-LCD 기술인력을 필요로 하니 직원들을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B사 측은 유씨가 직장을 옮길 경우 연봉 2억여원과 자동차.주택 등을 책임지겠다고 제안했다. 유씨는 회사 동료 김모(32)씨 등과 함께 이 제의를 수락했다.

회사를 옮기기에 앞서 유씨 등은 6세대 TFT-LCD 컬러필터와 관련된 A사의 각종 자료 3만5000여건을 복사해 자신의 컴퓨터에 보관했다. 이후 8~9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국준비를 해오던 중 국가정보원의 제보를 받고 수사에 나선 검찰에 모두 붙잡혔다. 다행히 이들이 빼낸 기술은 B사에 넘겨지지 않았다. 6세대 컬러필터는 컴퓨터 모니터.휴대전화 액정화면 등의 핵심 부품으로 우리나라와 일본만이 보유한 기술이다.

연구개발비만 3700억원이 든 6세대 컬러필터는 B사가 생산하는 4세대 컬러필터와는 수년의 기술격차가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기술이 유출됐을 경우 A사는 1조3000억원 상당의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는 5일 유씨와 김씨,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차씨 등 세 명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스카우트 협상에 관련됐던 대만의 B사 재무담당 이사에게는 피의자 자격으로 출두할 것을 통보했다.

◆ 항생제 중간체 제조기술은 유출돼=검찰은 국내 C사가 보유한 항생제 중간체 제조기술을 중국 회사로 넘긴 혐의로 C사 전 직원 김모(46)씨를 구속기소했다. 김씨는 C사에 재직 중이던 올 1~7월 e-메일을 이용해 20차례에 걸쳐 항생제 중간물질인 DAMA 등을 만드는 기술을 중국 회사에 건넨 혐의다.

김씨는 이 대가로 4만달러(약 5000여만원)를 챙겼다. 김씨는 또 올 5월 부인 명의로 국내에 회사를 차린 뒤 이 기술을 넘겨받은 중국 회사에서 제조된 3억여원어치의 항생제 중간체를 수입.판매한 것으로 조사됐다. C사는 수출 및 국내 판매에서 수십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 심각한 해외 기술유출=산업자원부에 따르면 2002년과 지난해 각각 5, 6건에 불과했던 해외 기술유출은 올해 8월까지 11건으로 늘었다. 98년부터 올 8월까지 적발된 51건 중 휴대전화기 등 정보기술(IT) 부문이 37건으로 가장 많았고, 유형별로는 연구원을 스카우트하는 수법이 대표적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높은 임금을 받고 기술을 팔아넘기는 국내 기술인력의 도덕적 해이뿐만 아니라 외국 경쟁기업의 끈질긴 포섭도 중요한 원인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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