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손길을 만나다, 가구가 숨쉬기 시작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우리에게 가구는 ‘브랜드’였다. 가구는 튼튼하면 됐고, 유명 브랜드면 괜찮았다. 그런데 서울 서교동 디자인 전문 ‘더 갤러리’에서 열린 가구 전에는 브랜드가 보이지 않는다. 회사 대신 작가 이름이 붙어 있다. 배세화·이민호·김경원·백은·김도훈 등 낯선 이름뿐이다. 작가가 브랜드인 셈이다.

작가 이름 아래엔 재료로 쓰인 나무 이름도 보인다. 물푸레나무·단풍나무·호두나무…. 요즘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나무 가구 디자이너 9인의 작품을 모은 ‘가구숲’ 전시다.

평범하고 소박한 작품 몇 점이지만, 여기에 담긴 꿈은 옹골차 보인다.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소장하고 있는 조지 나카시마의 의자처럼, 자신을 알아봐주는 주인과 교감하기를 꿈꾸는 ‘아트 퍼니처’라는 점에서다.

국내 젊은 가구 디자이너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왼쪽부터 강형구의 ‘테이블’(오크), 김도훈의 ‘의자’(물푸레나무), 김경래의 ‘줄기서랍장’(단풍나무 외 2종). [봄바람 제공]

◆가구에서 작품으로=전시장에 들어서니 등받이 한 켠에서 나무줄기가 치솟아 오른 의자가 보인다. 권재민(34)의 ‘줄기 의자를 키워라’다. 사람의 손길로 매끈하게 다듬었으면서도 ‘살아있는 나무’를 모티브로 한 유머가 돋보인다.

꿈틀거리는 듯한 줄기모양의 다리와 장식을 달고 있는 서랍장(김경래, 줄기서랍장)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치 나무에서 서랍장이 자라난 듯한 형상이다.

육중한 몸체를 곡선으로 다듬어놓은 나무 테이블(강형구)은 바위처럼 든든해 보인다. ‘가구숲’에 나온 작품은 나무라는 ‘존재’를 한껏 드러내도록 디자인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흔히 나무 가구 하면 먼저 떠오르는 투박한 느낌도 없다. ‘자연스러움이 곧 투박함’이라는 옛날 공식이 깨졌다는 얘기다. 대신에 디자이너들은 독창적인 선(線)의 표현에 승부를 거는 분위기다.

◆아트 퍼니처, 미래는 밝다=이번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모두 홍익대 목조형 가구학과 출신이다. 나이는 서른 살부터 마흔두 살. 국내외 디자인전 출품에 적극적이다. 이미 개인전을 연 이들도 있다. 이번에 조명 작품을 선보인 하지훈(38·계원디자인예술대 가구디자인 조교수)씨는 덴마크 디자인스쿨 출신으로, 한국의 유명 가구회사는 물론 이탈리아·프랑스의 기업들로부터도 ‘협업’ 의뢰를 받고 있다.

하씨는 “가구는 그간 국내에서 상품으로만 취급돼 왔다”며 “이제 작품으로 보는 시대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소비패턴이 타인의 시선보다 자기 만족 쪽으로 기울면서 ‘내가 매일 보고 쓰는’ 가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디자이너 김경래씨는 “리빙디자인페어 등에서 전시 작품을 보고 주문을 의뢰하는 개인과 기업이 부쩍 늘었다”며 “국내 가구 디자인시장이 활성화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02-3142-5558.

이은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