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지도] '기획자 사관학교' 신·씨·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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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영화사 신씨네. 한국 영화판을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많아 '영화판의 사관학교'로 불린다.

그러나 정식 직원은 여덟명 남짓이다. 1990년대 한국 상업영화를 떠받쳐온 회사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농담 삼아 "구멍가게 같다"고 말하자 신철 대표는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제작사의 생명력은 창조성과 유연성이다"고 받아쳤다.

현재 우리 영화계의 최고 파워맨으로 꼽히는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도 신씨네 기획물을 통해 오늘의 '영광'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과도한 입시교육에 시달리는 학교현장을 다룬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신세대 남편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그린 '미스터 맘마'를 히트시킨 강감독은 이후 강우석 프로덕션을 차리며 독자적인 영역을 확대해왔다.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제작비 1백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만들고 있는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도 신대표와 인연이 깊다.

서울대 재학 시절 농촌 마당극에도 함께 출연했던 두 사람은 90년대 초반 신씨네 공동 대표를 맡으며 '결혼이야기''미스터 맘마'를 제작했다. '미스터 맘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유대표는 93년 기획시대라는 독립회사를 차리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재수의 난' 등을 내놓았다.

'무사''봄날은 간다''화산고'등으로 지난해 한국 영화의 실험정신을 꽃피웠던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도 신씨네에서 제작부장.프로듀서로 근무했다.'미스터 맘마''101번째 프로포즈'의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신대표를 '영화 제작의 모델을 보여준 선배'로 정의했다.

이밖에도 '반칙왕''눈물'을 만든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나쁜 남자''수취인 불명'등 김기덕 감독의 신작을 선보인 LJ필름의 이승재 대표 등도 신씨네를 다니며 영화 기획.마케팅의 기본기를 닦았다. 그만큼 한국 영화의 중흥에 신씨네가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이승재 대표는 신대표를 두고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 영화의 전근대적 구조를 현대적 산업화 구조로 변모시킨 결정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영화 감독을 지망했던 신대표가 기획.제작자로 돌아선 것은 대중, 소위 관객의 속성을 주목하고부터다. 80년대 중.후반 피카디리.명보극장에서 일하며 겪은 경험, 즉 극장을 찾아오는 일반인들의 욕구를 확인하면서 대중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무겁고 진지한 내용도 부드럽고 재미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 이는 당의정(糖衣錠)이론과 흡사하다. "요즘도 후배들에게 영화는 존중하되, 관객에게 강요는 하지 말라고 자주 말합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비스업 아닙니까."

신대표의 현재 '화두'는 한국 영화의 국제화다. 현재 추진 중인 무협 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의 디지털 복원 사업을 시발점으로 삼을 작정이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세상사에 고단해하는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목표라면 목표지요"라는 말이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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