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21세기의 한국책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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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1년의 한국외교는 흉작이었다. 남북관계는 구걸하듯 고대하던 김정일의 답방이 결국 무산됐다. 실무회담도 한해 내내 입씨름만 하다 소생의 기약 없는 빈사상태에 빠져버렸다. 한.일관계는 교과서문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꽁치잡이 분쟁 등 악재의 연속이었다.

*** 신뢰 흔들린 주변국 외교

혈맹인 미국과의 사이에도 상호신뢰가 흔들린 한해였다. 부시정권은 북한의 위협이 여전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데 반해, 김대중정권은 위협이 현저히 감소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대북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정권은 부시정권이 내세우는 '검증 가능한 상호주의'가 지나치게 엄격한 것이라고 배격하고, 부시정권은 DJ의 '포괄적 상호주의'라는 것이 상호주의 아닌 모호한 정책이라고 못마땅해한다. 이 틈새에서 '미국은 통일을 방해하는 나라'라는 일부 젊은층의 반미 정서가 성장하고 있다.

여러가지 측면이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DJ의 햇볕정책이 북한 달래기에 치중한 나머지 미국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햇볕정책은 역설적으로도, 지난날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교섭을 통해 한.미관계를 이간하려던 '통미봉남(通美封南)'전략이 의도했던 바와 같은 결과를 초래해 버렸다.

한편 중국은 2008년 올림픽을 유치했고, 국제무역기구(WTO)가입의 꿈을 이뤘다. 국민총생산(GDP) 10조2천억달러로 이미 세계 6위인 이탈리아의 경제규모를 능가했다.

곧 세계 5위 프랑스를 추월할 것이라 한다. 자신감에 넘친 중국, 상하이의 푸둥(浦東)을 보고 '천지개벽'이라고 놀라는 것은 김정일만이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관계가 호전되는 듯하지만, 떠오르는 중국을 미국과 일본이 경계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 끼여 난처해져 있는 것이 한국이다. 미.일로부터는 '양다리 걸치기'라는 의혹의 눈총을 받으면서, 중국으로부터는 한국인 처형문제와 국회의원 입국거부에서 보듯 괄시와 핀잔을 당하고 있다.

이대로 좋은가. 21세기 한국의 대외적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론 한.미간 상호신뢰를 회복하고, 한.미.일간 정책공조를 확고히 하는 일일 것이다. 미.일에 할말은 하되 우리도 감상적 민족주의론에 미혹돼, 미.일과의 동맹으로서의 유대를 홀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맹외교와 줄서기 만으로 족할까. 그것은 21세기 한국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못된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충분조건은, 유럽에 비해 10년 이상 뒤진 동북아에서의 냉전종식을 완결하는 일이다.

그 구체적 과제는 두 가지.하나는 한.미.일 3국과 중국 사이에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을 개방시켜 반(反)테러 세계질서에 순응토록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도 한.미.일 3국간 정책공조 못지 않게 중국과의 협력, 중국의 활용이 긴요하다.

중국을 군사대국.경제대국 등 위협적인 존재로만 보고, 동맹의 강화로 대결하려는 것은 생산적 전략이 못된다. 21세기 한국은 동맹외교의 유지.강화와 함께 다른 한편 그 결함과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다자간 협력체의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동맹.다자간협력 추진을

20세기까지의 국제정치는 동맹과 세력균형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평화롭지 못했고, 강대국간 세력균형은 언제나 약소국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룩돼 왔다.

서세동점(西勢東漸)에 풍전등화 꼴이 된 조선도, '야만'(서양)을 끌어들여 '야만'(일본 또는 러시아)을 견제하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 곧 중국식 세력균형책에 따라 생존을 모색했다. 이홍장의 권고와 그 휘하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조언(助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망했다.

21세기의 '한국책략'은 『조선책략』식 세력균형 전략의 발상을 뛰어넘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동맹을 홀시하는 것이 이른바 과잉진보주의자들의 좌경편향이라면, 동맹에의 줄서기 만에 집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보수의 극우편향이 될 것이다. 동맹과 다자협력, 이 두가지 전략의 조화와 상호보완을 생존의 요체로 삼아야 한다.

김영작 <국민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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