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잘 있거라, 나무들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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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년을 살아오던 집을 버리고(!) 이사를 했다. 아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버린 것이 아니라 쫓겨나듯 이사를 했다.

내일이면 집을 넘겨주어야 할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우리 가족이 함께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집을 둘러보러 갔었다.

잠시 잠시의 어려움, 견뎌낼 만한 고통이야 왜 없었겠는가만 그래도 이 집과 함께 해온 스무해는 안온했었다. 딸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마음을 바꿔 아들을 하나 얻게 된 것도 이 집에서였다. 마음을 바쳐 몇개의 작품을 썼고, 바둑판 무늬의 거실 마루를 사방치기 하듯 거닐면서 사도신경을 외우며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내 머리에도 서리가 내렸다.

*** 줄장미.라일락과의 이별

스산한 마음을 달래며 마당으로 나서니, 한 자리를 지켜내며 스무해 동안 꽃을 피우고 잎을 키워준 라일락이며 목련이 단아하게 겨울을 넘기고 있었다. 한 그루를 심었는데도 현관문까지 쳐들어오듯 무성하게 뻗어나며 꽃을 피웠던 줄장미 옆으로는 모란이 추운 모습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도산서원에 들렀다 돌아오던 봄, 그곳의 무성한 모란을 시샘하며 심었던 것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잘 있거라 나무들아."

그러나 나는 알았다. 이제 집을 비워주고 나면 저 나무들도 이 집이 허물어져 나가는 것과 그 운명을 함께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자리에는 레미콘으로 들어붓는 시멘트 덩어리의 원룸 다가구가 들어서리라는 것을.

20년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그려낸 전염병의 전율을 떠올리게 했다. 뒷집이 헐리고 4층짜리 다가구로 변한 것이 몇년 전이었다. 주차난과 소란함이 조용하던 골목을 점령해 버렸다.

전염병은 전쟁으로 변해갔다. 좌우의 옆집이 헐리더니 좁은 마당을 이웃한 앞집까지 헐리면서 5층짜리 다가구 공사가 시작됐다. 더 이상 어떻게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내 집을 덮쳤던 것이다. 동쪽.서쪽.남쪽에서 햇살을 가리며 치솟는 시멘트 절벽 속에서 내가 신음처럼 내뱉은 '삶의 질'이라는 말은 공허하고 또 공허했다.

어쩌면 이제 서울에서 집과 집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오순도순 자리한 그런 주택가는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독주택을 헐고 들어서는 다가구니 다세대니 하는 공동주택들. 삶의 하향화로 상징되는 이 괴물집단이 십여년 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나 하는가. 그리고 이렇게 삶의 질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행위를 정부 정책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지울 수 없다.

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난잡한 간판으로 온통 도장(塗裝)을 한 건물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약국이다. 최근 약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거의 경악에 가깝다.

약. 약. 약. 약. 약. 문에도, 창에도 심지어 건물 전부를 '약'이라는 글자로 도배해버린 약국도 있다. 국민건강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약사들의 행태가 이래도 좋은 것인가 묻고 싶어진다. 국민의 정신건강도, 눈의 피로도 생각해야 할 분들이 아닌가.

*** 건축의 어디에 음악 있나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 건축으로부터 받게 되는 느낌은 음악이 주는 느낌과 닮아 있다고 괴테는 말했다. 우리 건축의 어디에 음악이 있는가.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이란 한시대가 잉태한 정서를 물질적인 형태로 정착시키는 정신체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겨우 지금 이런 건물, 이런 거리의 정신체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혐오스럽고 난잡하고 비인간적인 정신체계 속에.

그래도 조금은 사람냄새가 나는 동네를 찾아다닌 끝에,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녹색소비자연대'가 서울 주거지역의 최고 최악의 거리를 다섯 개씩 뽑아 발표했다. 아, 어쩔 것인가. 내가 이사온 서초구 방배동 방배역 주변은 나쁜 거리의 제1위로 선정돼 있지 않은가!

韓水山(세종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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