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부터 읽을까] 페미니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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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제는 해원(解寃)의 시대라. 바야흐로 사람도 이름없는 사람이, 땅도 이름없는 땅이 기세를 얻으리라." 구한말의 민족종교 지도자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의 이 유명한 발언은 해원사상으로 요약된다. 해원사상은 요즘 말로 하면 해방사상쯤 된다.

이를 위해 '땅도 뜯어고치고, 하늘도 뜯어고쳐' 묵은 기운을 없애버리자는 천지공사(天地公事) 내지 개벽에의 권유다. 새 세상은 당연하게도 음(陰)의 시대, 여성의 시대로 상정된다.

풀잎 하나, 흙바른 벽에까지 신명이 깃들여 있다고 보는 진보적 생명사상을 가진 증산이 남성중심주의.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해 1백년 전에 선견지명을 보인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종교적 환시(幻視)형태의 여성시대를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천지공사의 공학(工學)은 우리 시대의 몫이다. 그래서 그럴까?

즉 현실 속에서 '여성의 분노한 목소리'는 아직은 미미해 증산식의 '음의 시대'는 턱없는 유토피아로 보일지 모르지만, 책방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넘쳐나는 게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딱딱한 여성학 이론서들이 주류였던 사정과 달리 읽을거리로도 유쾌한 책들이 즐비하다.

비소설 장르 뿐 아니라 소설이나 시집 같은 문학 장르의 책들도 상당수다. 번역서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읽기 편안한 국내 저자들의 책도 취향과 눈높이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목소리의 경우도 도발에 가까운 전투적 선언에서 부드럽게 사람을 설득하는 경우까지 편차가 크다.

따라서 옆의 '책이 있는 토크쇼'로 엮은 소설가 이경자의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와 진보적 여성 신학자 정현경의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는 빙산의 일각이다.

두 책을 기준으로 비슷한 컬러의 책으로 우선 추천할 만한 것은 『새로운 종의 여자 메타우먼』(김진애 지음, 김영사) 『담배 피우는 아줌마』(이숙경 지음, 동녘)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시사인물사전 14』(이휘현 외 지음, 인물과 사상사) 등 세권이다.

『새로운 종의 여자 메타우먼』의 경우 여성 건축가 한 명이 21세기는 여성성의 세기라고 담대하게 선언한다.

쉽게, 재미있게 읽히는 이 책은 새로운 종(種)의 여자, 메타우먼의 대망론(待望論)이지만 이 메시지에 남성들이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저자가 겨냥하는 것도 남성성과 여성성이 균형잡힌 정음정양(正陰正陽)일테니까.

『담배 피우는 아줌마』는 무엇보다 친근하게 읽힌다. "이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 그리고 아줌마가 있다"는 말처럼 제3의 인류로 등장한 아줌마들의 자기선언이 밉지 않은 수다로 읽힌다.

이밖에 『남자들은 모른다』(김승희 지음, 마음산책) 『다이어트의 성 정치』(책세상 문고 제18권) 등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단행본에서 양이 차지 않을 경우 잡지.무크 등을 통해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뒤집자 웃자 놀자'는 모토 아래 대표적인 대중적 페미니즘 저널로 자리잡은 지 오래인 '이프'는 범용성(汎用性)이 훌륭한 읽을거리이고, 다소 학술서 성격의 무크인 『여성의 몸, 여성의 나이』(또 하나의 문화 발행)의 경우 이론적 배경을 읽어내기에 좋을 듯 싶다.

페미니즘 관련 소설과 시집도 상당수다. 이중 추천할 만한 것은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김연 지음, 한겨레) 『허난설헌』(김신명숙 지음, 금토)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배수아 소설, 이룸) 『나도 소주 다섯 병을 마실 수 있다』(최승은 지음, 이레) 등이다.

국내 페미니즘 관련 저술들은 아직 개척 여지가 많은 '단행본의 나대지(裸垈地)'로 남아 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다양한 저술은 기대에 못미친다는 점이다. 이런 빈칸은 번역서에서 채울 수밖에 없다.

우선 추천할 게 『제1의 성』(생각의 나무)이다. 헬렌 피셔가 지은 이 책은 여성의 세기를 선언한 인류학 탐험서로, 단아한 판형에 양장본을 한 책의 만듦새 역시 훌륭하다. 『동경대에서 페미니즘을 배우다』(하루카 요코 지음, 창조문화) 역시 편안하게 읽힌다.

일본사회의 잘나가는 탤런트 한 명이 어느날 갑자기 갖게 된 페미니즘 관련 의문이 제기돼 있고, 그가 동경대의 대표적 페미니즘 이론가 우에노 교수와 가진 밀고 당기는 배움이 살갑게 읽힌다.

그러나 역시 주류는 남성의 사회 속에서 질식당하지 않고 버젓이 성공을 거둔 여성들의 삶을 모아놓은 책들이 편안하게 읽힐 것이다.

다소 난이도가 높은 읽을거리로는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캐럴 페이트먼 지음, 이후) 『아주 작은 차이』(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이프)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진 시노다 볼린 지음, 또 하나의 문화) 『자궁의 역사』(라나 톰슨 지음, 아침이슬) 등을 권유한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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