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내셔널 어젠다] 1. 대통령-제왕에서 CEO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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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해 봄 대통령 주재 경제장관회의에 처음 참석한 A장관은 '대통령은 구름 위에서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임금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토론회는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 옆인 소회의실(집현실)에서 오찬을 겸해 진행됐다. 경제부총리와 장관들이 문 입구에 도열해 있다가 대통령을 맞았다.

재경부 장관을 시작으로 3~4분씩 각 장관의 보고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꼼꼼히 준비한 메모를 보면서 각 장관에게 해당 부처의 관련사항을 면접시험보듯 물었고, 장관들은 여기에 요령있게 대답하는 게 토론회의 전부였다고 한다.

A장관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하이닉스 반도체 문제를 가부간 빨리 결론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타부처 업무 소관이었다. 이에 대해 金대통령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장관들도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보고가 끝난 뒤 대통령의 '말씀'이 10여분간 이어졌다. 장관들은 열심히 노트에 받아썼다. 청와대 본관을 나서면서 다른 장관이 A장관에게 "참 용기있으시네요"라고 한마디 했다. A장관은 밤새 그 뜻을 생각해보다가 그 다음 회의부터는 타부처 업무에 대해 입을 닫았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제왕적 대통령은 문화와 시스템에서 비롯하는 바 크지만, 공간의 탓도 적지 않다는 것이 전현직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의 지적이다. 청와대란 건물의 중압감이 '황제 앞에 선 신하' 같은 느낌을 준다는 얘기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난 사람들의 중압감은 더했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육중한 집무실 책상 건너편에 사람을 세워 놓고 보고받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공보수석이었던 한나라당 윤여준(尹汝雋)의원은 "보고를 마치고 뒤돌아 설 때마다 '내가 등을 보이면서 나가면 무례를 범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무비서관이었던 박진(朴振.이회창 총재 특보)씨는 "대통령 책상에서 수십걸음을 뒷걸음쳐 물러나오다 보니 다리가 꼬여 넘어진 장관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등도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옆문으로 나갔다 다시 정문으로 들어간다. 걸어서 대통령 집무실까지 가려면 10분쯤 걸린다.

대통령이 집무실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비서실장실.부통령실.안보담당보좌관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미국의 백악관과는 사정이 다르다. 청와대가 대통령과 참모들을 수백m 떨어뜨려 놓은 분리독립형이라면, 백악관은 대통령과 보좌진 사이에 언제든지 원탁토론이 가능한 CEO의 공간개념으로 짜여 있다. CEO의 공간은 의전과 위엄보다 기능과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집무실의 규모와 분위기도 하늘과 땅 차이다. 집무실의 출입문에서 대통령이 앉아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청와대의 경우 15m쯤인데 비해 백악관은 2~3m밖에 안된다.

두 곳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코앞 거리에 있던 클린턴 대통령이 바로 일어나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하면서 책상 건너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도록 권하더라"며 "긴장이 순식간에 확 풀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건축가 승효상(承孝相)씨는 "인간은 스스로 만든 공간에 지배당한다"면서 "지금의 청와대는 건물이 사람을 압도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본관의 구조와 공간배치는 왕조시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란 개념이 적용됐다고 한다. 본관을 설계했던 정림건축의 김정식(金正湜)회장은 "청와대의 주문으로 전통 궁궐의 모양을 두루 참고했다"며 "기능성보다 대통령의 권위를 부각하는 데 치중했다"고 밝혔다.

건물 높이는 보통 아파트 10층에 해당하는 30m이며 연면적은 지하층과 1, 2층을 합해 2천5백여평이다. 15m 높이의 한옥식 팔작지붕이 무겁게 누르고 있는데 제왕적 위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상근하는 인원은 대통령을 포함해 10여명에 불과하다.

집무실 외에 대회의실.대식당.접견실 등 의전.연회용 공간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어가행렬도(御駕行列圖).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십장생문양도(十長生紋樣圖) 같은 대형 궁중그림까지 가세해 제왕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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