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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첫 아침 성석제 콩트] 말(馬)타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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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여러분은 말(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말띠 팔자? 지금 말씀하신 여성 분이 말띠신가요?

제 누이 둘이 모두 말띠입니다. 쌍둥이는 아니고 띠 동갑이지요. 제가 딱 중간에 있구요. 그들은 팔자가 드셀 거라는 말을 귀가 닳게 들어온 것만 빼면 무난하게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큰누이는 어린 시절 제게 목말을 많이 태워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지럽고도 황홀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 또 뭐가 떠오르십니까. 경마? 저 역시 그렇습니다. 말을 경주에서 활용한 지는 오래되었지요. 대표적인 게 윷놀이입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군요. 저가(猪加), 구가(狗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대사(大使) 같은 부여족의 대가(大加)에 해당하는 도.개.걸.윷.모의 모가 말입니다.

모가 나면 다섯 밭을 갈 수 있고 다시 한 번 더 놀 수가 있지요. 말이 돼지, 개, 양, 소, 말 다섯 짐승 가운데서 제일 빨라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요.

윷놀이는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지요. 하지만 본격적인 경마는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현재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경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밖에 없는 경마도 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해볼 참입니다. 그 경마는 바로 조랑말 경주랍니다.

세계적으로 경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종입니다. 영국의 암말과 아라비아의 수말을 교배시켜 경주용으로 개량한 잡종인데 속도가 빠르고 힘도 좋지요. 다 큰 서러브레드는 체고가 평균 1백63㎝쯤이고 체중이 4백50㎏이랍니다. 최고 시속은 60㎞가 넘지요. 그 말이 결승선을 치고 들어올 때의 박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 조랑말은 어떠냐. 제주도에서는 고려 때 원나라에서 몽골말을 들여오면서 본격적으로 사육을 하기 시작했고 번성기에는 전체 마필수가 2만 마리를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1천여 마리로 줄어들었다는군요.

조랑말이란 이름은 속명이고 공식 명칭은 '제주 재래마'라고 한답니다. 체고가 1백10~1백20㎝, 체중은 세 살 기준으로 2백30㎏ 정도입니다. 서러브레드에 비하면 아주 아담하죠. 제주 조랑말은 원래 연자방아 돌리기나 짐수레 끌기, 밭갈기 등등에 많이 쓰였지요. 속도를 내기 위해 혈통을 개량한 말이 아닙니다.

시속 60㎞로 밭을 갈아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러니까 조랑말은 경주에는 적합하지 않은, 아니 경주를 해본 적도 없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째서 세계 최초로,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경주에 뛰어들게 되었던가. 말띠에 전설 전문가이며 경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게 들려준 전설이 있습니다.

1980년대 대통령인가 대령인가 하는 어느 인사가 제주도로 놀러, 아니 민정을 시찰하러 왔습니다. 그는 골프를 치고 오다가, 내기 골프였는지도 모릅니다, 산간 마을에 한가롭게 뛰어노는 조랑말, 아니 제주 재래마를 보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60년대 후반부터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조랑말, 아니 제주 재래마, 이거 왜 자꾸 조랑말이란 말부터 튀어나오는지, 하여간 쓰임이 줄어들어 숫자가 격감하는 제주 재래마를 보호 육성하고 관광진흥을 통한 지역사회 개발과 축산진흥 등을 목적으로 경마장을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했던 것입니다. 이건 물론 공식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이고 실제는 어땠을까요. 실제는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만, 하여튼 전설로는 이렇습니다.

"어이, 마 실장. 저 쪼랑말로 경마 겉은 거 하마 어떻겠노?"

여기서 실장이 경호실장이냐 비서실장이냐 같은 걸 따지면 안됩니다. 전설이기 때문에. 또 당시 마 씨 성을 가진 실장이 대령인지 대통령인지를 수행을 했느냐 어쩌느냐 하는 것도 따지면 안되겠습니다. 왜냐구요? 전설이잖습니까. 하여간 마 실장은 대답합니다.

"마, 그거 역사에 길이 남을 영단이십니다. 아까 도지사 말도 요새 관광객이 줄어서 걱정이 태산이라 카대예. 당장 그리 하시지예."

"어허 이 사람이 나보다 우째 성질이 급한가. 급할수록 돌아가라 안 카나. 무슨 문제는 없을랑가?"

"마, 하면 된다, 이런 팻말을 경마장 공사장에 걸어놓도록 조치하겠십니다."

"공사는 우째든동 쪼랑말이 쪼만해서 사람을 싣고 잘 뛸랑가. 팍 꼬구라지는 거 아이가?"

"마, 마, 마, 마 그라모 조랑말 목장 출입구에 축구장맨쿠로 크게 전광판을 설치하겠십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 이래 번쩍번쩍 하구로 조치하겠심다."

"그래, 말들이 글자를 잘 알아볼지 모를따. 그란데 니 경상도 말이 마이 늘었다. 처음에는 먹는 살을 자꾸 쌀이라 캐쌓더이."

"마, 이기 다 하면 된다는 각하의 말씀을 자나깨나 외고 또 왼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이런 기획이 86년에 입안되어 세계 최초인 조랑말 경주장이, 아니 제주경마장이 90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마장에서 조랑말, 재래마, 제주마, 자꾸 헛갈려서 안되겠으니 그냥 조랑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야성이 남은 조랑말은 링과 풀밭을 구별하지 않고 틈만 나면 서로 발길질을 해댄다고 합니다.

뜯어말리고 나서 물어보면 저희가 조금 큰 캥거루인 줄 알았다고 한다는군요. 경주용이 아니니 느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경마에 쓰이는 말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느린 말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전설은 계속되었으니, 우승마를 예측하기가 가장 어려운 경마라는 전설적인 전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경주마의 성적을 예측하는 데는 과거의 경주 성적, 예를 들어 순위 ·경주기록 ·3퍼롱(결승선 직전 6백m의 주파시간), 말의 컨디션, 경주거리, 기수와 말의 관계, 부담중량, 경주로 상태 등등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의 습성이 있지요. 먼저 치고 나가는 말이냐, 나중에 따라잡는 말이냐, 앞서서 도망을 잘 가지만 한 번 추월당하면 전의를 상실하는 말이냐, 선두권에 있다가 결승선 앞에서 치고 나가는 말이냐 등등.

최초로 조랑말 경주가 열렸을 때는 이런저런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건 사실 어떤 경마장도 최초로 열리면 마찬가지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료가 축적이 되고 자료의 정확도는 높아갑니다.

그런데 조랑말 경주는 시간이 웬만큼 지나도 정확도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조랑말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생활에 쓰는 말을 경주마로 급조했으니 당연한 결과였겠지요.

조랑말의 변덕에 따라 기록이며 순위가 제 멋대로 바뀌었습니다. 뒤로 가고 싶으면 뒤로, 운동장으로 가고 싶으면 운동장으로, 풀밭이 마음에 들면 그 곳으로, 누가 약을 올리면 한 대 차 주러 가고 또 갔으며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꿈의 경마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캔터키 더비, 영국의 입섬 더비, 일본의 재팬 더비를 모두 다녀왔다는 경마광인데, 게다가 켄터키 더비에서는 64배인가를 따기도 했답니다, 그는 도대체 조랑말 경주에서는 딸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제주경마장이 개장을 하고 5년째였으니 얼마나 조랑말 경주가 어려운 것이었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면서 우승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 이걸 경마장에서는 '똥말'이라고 합니다만 말하기 거북스러우니 이후부터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조랑말 경주장에서 말입니다.

×말이 드러나면 폐마가 되어 밖으로 퇴출됩니다. 고기가 되거나 원래처럼 일상생활에 쓰이게 되겠지요. 시간이 걸렸다는 것뿐이지, 조랑말 경주도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름도 경마공원으로 바뀌었다는군요.

중국의 순자는 '기(驥)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노마(駑馬 : ×말)도 열흘이면 이를 따른다(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卽亦及之矣)'고 했습니다. 이제 조랑말도 천리길을 천 번은 넉넉히 달렸을 겁니다.

말을 사람에 비유할 수 있듯이 사람도 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경마장과는 달리 인간 세상에서는 ×말임이 드러나도 쉽게 퇴출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임기가 있으면 ×말일수록 그 임기를 꽉꽉 채웁니다. 어떤 곳에는 ×말만 모여 있는데 그 말들에도 배당금이 꼬박꼬박 돌아간다고 합니다. 제도적으로 국민, 아니 국마(國馬)가 십시일반으로 내놓은 콩이며 당근을 나눠먹도록 ×말끼리 결정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경마장과 달리 이 ×말들이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 일반 말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겁니다. 아, 이 ×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아는 그 분야, 아니 업계의 ×말 하나는 청년 시절에는 눈부시게 팔팔하고 영민했습니다. 거기 들어가고 나서는 어느새 다른 말과 나란히 무기로 써도 좋을 강력한 마분(馬糞) 냄새를 풍기게 되었지요. 나는 요즘 그와 마주칠까 싶어 '오늘의 운세'를 보고 외출합니다.

올해는 임오년, 말띠 해입니다. 띠를 쓰는 동양의 한 ·중 ·일 세 나라가 모두 다 올해 5월 푸른 풀밭에서 공을 차며 말처럼 뛰게 되었습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다시 비유컨대 검은 말(加羅馬), 흰 말(松骨馬), 붉은 말(절따말)도 5월의 푸른 풀밭에 와서 갈기를 휘날리며 공을 찰 겁니다.

여러분, 또 말 하면 생각나는 게 없으십니까? 자, 없으시면 제가 묻겠습니다. 우리가 말이라고 하고 우리의 생은 경주일까요, 아닐까요? 경주라면 누가 시킨 걸까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일까요?

성석제(成碩濟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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