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박중훈, 웃음 뒤에 남는 짠한 그 무엇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21면

박중훈(44)을 19일 만났다. 새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으로 무려 50개의 인터뷰를 소화한 마지막 일정이다. “제작비 10억원짜리 이 영화에서 내 출연료가 4분의 1이다. 당연히 흥행도 책임져야 하고, 홍보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영화는 찌질한 조폭 동철(박중훈)의 지하 옆 셋방에, 취업난에 시달리는 지방대 출신 세진(정유미)이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틀에 88만원 세대의 초상을 얹었다. 장르영화지만 장르 일변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정색하지도 않는, 영리한 균형감의 영화다. 그 균형점의 복판에 박중훈이 있다. 80년대 청춘스타(‘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로 시작해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같은 사회드라마를 거쳐 90년대 코믹액션(‘투캅스’)의 독보적 영역을 개척했던 그가 오랜만에 적역을 만났다는 호평이다. 한때 흥행보증수표였던 ‘박중훈표 코믹 넉살연기’가 연민이 깃든 페이소스를 자아내며 객석과 공명한다.

어느덧 자신의 궤적 속에 한국영화의 역사가 읽히는, 데뷔 25년 차 중견배우다. 데뷔작부터 줄곧 톱이었던 그를 누군가는 “유쾌한 생명력의 배우”라고 했다. 그 생명력은, 좋은 배우이기 전에 좋은 인간이고자 하며, 자연인의 삶과 배우의 삶을 정확히 일치시켜 삶 속에서, 삶을 연기하려는 그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운대’ 윤제균 감독(제작자)과 또 손잡았다.

“윤 감독이 ‘해운대’ 마치고 팔딱팔딱 뛰는 캐릭터가 있다며 건네준 시나리오다. 나와 윤 감독은 지향점이 같다. 착한 사람이 좋고, 착한 게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선하고 강하고 똑똑한 영화를 좋아한다.”

-데뷔 감독(김광식)에 저예산영화다.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영화였다. ‘해운대’가 되는 영화에 내가 묻어간 거라면, 이번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어 부담이 됐다. 2000년대 들어 내가 흥행적으로 자생력이 없는 배우니까, 오히려 제작 사이즈가 작다는 것이 안심이 되기도 했고(웃음).”

-스스로 흥행부진을 인정하는 건가.

“2000년대 들어서는 ‘황산벌’ ‘라디오스타’ 외에는 된 작품이 별로 없으니까. ‘해운대’는, 영화는 터졌지만 배우로서는 각이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남들이 날 흔들 땐 흔들리지 않는데, 내 스스로 흔들릴 땐 굉장히 당황한다.”

-그 이유가 뭐라 보나.

“90년대 너무 해먹은 죄도 있고(하하). 90년대 액션 코미디에서 강렬하게 연기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이러면서 나한테는 어려움 모르는 강자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 나한테 딱 하나 없는 게 바로 동정표다. 그 탓일까, 관객들은 나를 통해 삶의 아픔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 친숙함이 주는 진부함도 있고, 물리적으로 나이도 들고.”

-상당히 냉정한 자기분석이다.

“예술가가 감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보니 객관성이 부족할 때가 많다. 감성을 감성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생활까지 감성으로 하는 게 최고인지 알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삘’(feel)로만 사는 게 배우의 특권이라 여긴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하지만 감성을 표현하고 실어 나르는 것은 이성이다. 감성이란 검정 원유가 있다면, 이걸 이성으로 정제해 휘발유가 돼야 차를 움직일 수 있다. 정제 안 된 원유보다는 차라리 가짜 휘발유가 차를 움직인다. 과장하자면 이성 없는 검정 원유란 쓸모없는 감성이다.”

-동철은 최근 유행하는 루저 캐릭터다.

“시대상도 있겠지만, 영화 관객은 기본적으로 루저 본능이 있잖나. 외양, 돈, 사회적 권력, 건강 이런 걸로 사람이 규정된다면 이를 다 가진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루저, 주변인 정서를 갖고 극장을 찾는다. 번듯한 엘리트가 영화에서는 조연인 것도 그 때문이고.”

-찌질하고 코믹한 조폭 연기의 포인트는.

“사실적인 연기다. 나는 예전에 관객을 너무 웃겨놔서 웃음에 대한 자기검열이 있다. 관객을 너무 웃기면 내가 과거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어, 어떻게 하면 좀 덜 웃길까 고민했을 정도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희한한 딜레마였다(웃음). 사실성과 코미디가 충돌할 때는 무조건 코미디를 포기했다.”

-그래설까. 극중 박중훈의 코믹 연기는 끝났거나 절제됐는데 객석에선 지나간 장면을 떠올리며 키득대더라.

“내가 남 웃기는 건 좀 자신 있다(웃음). 초고 다닐 때 전교에서 제일 웃기는 학생이 아닌 적이 없다. 시상식에서 대본 없이 알아서 웃겨라 해도 겁 안 나고.”

-그런데 왜 웃음을 절제하나.

“오래 웃기려고(하하). 웃음에도 진정성, 사실성이 결여되면 기능의 향연일 뿐이다. 역지사지, 공감의 능력, 청자의 입장에서 가려운 곳 긁어주는 데서 웃음이 나오는 것 같다.”

-때리기보다는 주로 맞지만 액션도 강도 높다. 특히 클라이맥스 장면.

“맨 마지막에 3일간 찍었는데 완전히 탈진했다. 물리적으로 힘든 것보다 감정을 수세미로 박박 갈아댄 여진 때문에 힘들었다. 이런 게 감정노동자인 배우의 제일 나쁜 점이다. 관객들은 동철이 귀엽다고 하지만 조폭은 조폭, 내면은 거칠다. 영화 찍는 3개월 내내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을 내서 가족들이 내 눈치를 봤다.”

-그런 감정은 어떻게 푸나.

“감정의 부기를 빼려 혼자 여행을 떠난다. 그나마 가족이 있어 일상 회복이 빠르다. 만약 싱글이었다면 정말 괴팍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는 배우에게 가족은 족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식처이자 치유의 공간이다. 임권택 감독님의 ‘달빛 길어올리기’를 찍으면서도 치유가 많이 됐다.”

-스스로 동정표 없고 ‘불사조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면서, 루저 정서는 어떻게 이해했나.

“유추의 능력이다. 배우가 모든 것을 체험할 수는 없으니까. 역지사지, 남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이 연기의 출발이다. 한마디로 좋은 배우는 휴머니스트,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 예전엔 시나리오를 받으면 ‘이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죽을 만큼 열심히 했다. 지금은 뭐라 쓰는지 아나? ‘도와주소서’다. 열심히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세상 일이 혼자 잘나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단 얘기다.”

-감독 데뷔를 꿈꾼다면서.

“내년 계획이다. 5년 전부터 뭔가 하고픈 얘기가 있는데 정리가 잘 안 되다 최근 얼개가 잡혔다. 오만한 남자가 몰락하면서 관계가 변해 가는 얘기다. 역시 윤제균 감독이 제작한다.”

글=양성희 기자 ,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박중훈 출연작
1986 ‘깜보’
1987 ‘됴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1988 ‘바이오맨’ ‘아스팔트위의 동키호테’ ‘칠수와 만수’ ‘지금은 양지’
1989 ‘내 사랑 동키호테’ ‘애란’
1990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3 ‘투캅스’
1994 ‘젊은 남자’ ‘머나먼 쏭바강’(SBS) ‘마누라 죽이기’ ‘게임의 법칙’
1995 ‘꼬리치는 남자’ ‘총잡이’ ‘돈을 갖고 튀어라’
1996 ‘체인지’ ‘투캅스2’ ‘깡패수업’
1997 ‘인연’ ‘할레루아’ ‘똑바로 살아라’ ‘현상수배’
1998 ‘아메리칸 드래곤’
1999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 ‘불후의 명작’ ‘세이 예스’
2002 ‘찰리의 진실’
2003 ‘황산벌’
2004 ‘투가이즈’
2005 ‘천군’
2006 ‘라디오스타’ ‘강적’
2009 ‘해운대’ ‘달빛길어올리기’(개봉예정)

※ 사진 혹은 이름을 클릭하시면 상세 프로필을 보실 수 있습니다.[상세정보 유료]
※ 인물의 등장순서는 조인스닷컴 인물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순서와 동일합니다.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영화배우

1966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