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현승 '지평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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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눈이 끝나는 곳에서

그 마음은 구름이 피고

이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 뜻은 더욱 멀리 감돈다.

한 세상 만나던 괴롬과 슬픔도

끝에선 하나로 그리움이 되고

여기선 우람한 기적도

거기선 기러기소리로 날아간다

지나가 버린 모든 시간,

잊히지 않는 모든 기색

나는 그것들을 머언 지평선에 세워두고

노을에 물든 그 모습으로

김현승(1913~1975),'지평선'

지평선은 단순히 이곳으로부터 저곳까지의 물리적 거리가 만드는 선이 아니다. 지평선에 이르면 '이'곳이 '그'곳으로 차원을 바꾼다. 수평으로 뻗어가던 시선이 수직으로 뜨는 구름이 되고, 앞으로 달리던 기차가 위로 날아오르는 기러기로 변한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가슴 질리는 날은 슬픔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지평선을 바라보자. 노을에 물든 추억대신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가 시선을 찍어누르는 겨울날 오후엔 북한산 바위에라도 올라가 보자.'말'이 끝나는 곳,'뜻'마저 끝나는 그곳이 보일 때까지.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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