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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 없는 개혁은 없다” …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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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수형카드 사진 속 그의 눈매가 매섭다. 3·1운동 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민족자존을 위해 싸울 것을 천명하는 ‘공약삼장’을 썼던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했다. “피고는 금후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 답해 독립을 향한 굴하지 않는 의지를 불태웠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

국망(國亡)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1905년 1월 속세를 떠나 불문에 귀의한 한용운은 자기 한 몸의 해탈을 위한 독경(讀經)과 수행에만 정진할 수 없었다.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한 『영환지략(瀛環之略)』과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을 설파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이 두 권의 책이 준 충격에 사로잡힌 그는 산중을 떠나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을 품었다.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때이니까 불교문화뿐만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隆興)한다는 일본의 자태를 보고 싶었다.”(‘나는 왜 승이 되었나’, 1930).

1908년 약 반년간 머물며 그는 이 땅의 불교가 산간에서 내려와 일본처럼 세상 속에서 대중과 함께 숨쉬게 하고픈 욕망을 품었다. 그때 ‘사원불교에서 가두불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은둔에서 참여로,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거듭난 일본 불교는 그의 눈에 따라 배울 모델로 다가섰다. “불교는 구세(救世)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衆生濟度)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 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1910년 3월 그는 불교를 세간으로 끌어내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불교 대중화의 열정을 담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唯神論)』을 썼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 1913년 5월 25일 활자화된 이 책은 불교개혁을 논하는 모두에게 큰 울림과 깨침을 준 죽비(竹扉)소리였다.

“만석의 뜨거운 피 열말의 담력/ 한칼에 버려 내니 서리가 뻗쳐/ 고요한 밤 갑자기 벼락이 치며/ 불꽃 피는 그곳에 가을 하늘 높아라.” 그러나 그가 안중근의 의거에 접해 그 뜻을 기리며 지은 시가 웅변하듯, 그가 잡은 주된 화두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고민이었다.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을 맞아 그는 백용성과 함께 불교대중화를 꿈꾸는 종교지도자에서 민족 전체의 앞날을 걱정하는 민족지도자로 우뚝 섰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님의 침묵’, 1925). 그토록 사랑했던 님이 다시 돌아오기 한 해 전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과 시는 여전히 우리의 미망(迷妄)을 깨우는 목탁으로 크게 울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