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0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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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창진의 호통에도 염문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소인을 대역죄인이라니요. 소인을 노비를 약취하여 팔아먹는 노비상인이라니요. 잘못 보셨나이다, 나으리. 소인은 나으리께오서도 잘 아시다시피 다만 백제악을 연주하는 악공인에 불과하나이다."

그러나 이창진의 부하들이 샅샅이 집을 뒤져 염문이 쓰고 다니던 방상시의 탈을 찾아내었다. 이로써 염문이 바닷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대로 불리던 죽음의 악마, 바로 그 노예상인임이 밝혀짐 셈이었다.

"네 이놈, 이래도 시치미를 떼겠느냐. 이 방상시의 가면이야말로 네놈이 쓰고 다니면서 노비들을 약취하던 바로 그 황금사목이 아닐 것이냐."

황금사목(黃金四目).

이는 '황금으로 만든 네개의 눈을 가진 가면'이란 뜻으로 최치원은 이 가면을 '대면(大面)'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천연두의 역신을 몰아내는 황금탈의 일종이었다. 그러자 염문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으리, 이 탈은 악공인들이라면 누구나 쓰고 다니는 가면임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특히, 사내금(思內琴)을 연주할 때면 무척(舞尺)들이 쓰고 춤을 추던 가면이나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왕이었던 애장왕(哀莊王)8년 2월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2월. 왕이 숭례전에 어좌하여 주악(奏樂)을 듣고 즐겨보았다."

이때 애장왕이 즐겨 관청(觀聽)하였던 음악이 바로 사내금이었고, 이 음악을 연주할 때면 무척들은 푸른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이 장면을 최치원은 '황금빛 얼굴,그 사람이 구슬 채찍 들고 귀신을 부리네'라는 잡영시(雜詠詩)로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부하들이 마루 밑에 숨어있던 해적 이소정을 찾아내어 끌고 오자 염문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네 이놈."

이창진이 다시 소리쳐 호통하였다.

"이래도 아니라고 우길테냐. 이놈은 해적으로 국법으로 엄금된, 노비를 국외로 몰래 반출하여 노예시장에 팔아먹으려다 붙잡힌 자이다.뿐 아니라 입도형을 받고 섬에 갇혔다가 탈출하여 도망친 대역죄인이니라.이놈이 바닷가에서 닷새간이나 도망쳐 네놈의 집으로 들어와 이처럼 마루 밑에 숨어있다 발각되었다면,이놈이 네 부하이고,바로 네놈이 노비를 팔아먹은 원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여봐라,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 얼른 저놈을 체포하여 두손을 묶고 포박하지 않겠느냐."

이창진의 말을 들은 한 떼의 군사들이 염문을 체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그 순간 염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제자리에서 높이뛰기를 하여 공중으로 치솟아 비상하였던 것이다. 거의 동시에 염문은 자신이 들고 있던 피리의 끝부분을 벗겨 내렸다.

보통 피리는 관(管)에 입을 대고 부는 설(舌)을 꽂아 불었는데,염문이 그 설을 뽑아 내리자 날카로운 칼이 나타난 것이었다. 염문은 자신이 부는 필률을 악기 뿐 아니라 유사시에는 무기로도 사용했던 것이다.

거의 동시에 염문의 칼이 가장 가까이 선 군사의 목을 아주 낮은 자세인 탐해세(探海勢)를 취하더니 순식간에 목을 찔러 쓰러뜨렸다.

이른바 역린자(逆鱗刺)였다.

역린자는 단숨에 칼을 비스듬히 틀어 상대방의 목을 찔러 일격에 쓰러뜨리는 검법으로 검술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격세(擊勢)였던 것이었다. 일격에 급소를 찔린 병사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자 쳐들어가던 군사들의 기세가 일단 꺾여 멈칫거렸다.

"오냐."

염문이 세피리로 만든 검을 머리 위로 수직으로 치켜들어 조천세(朝天勢)의 자세를 취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 않을 것이다. 오너라. 몇 놈이든 상대하여 모두 단칼에 베어 죽일테니까."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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