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투데이] "아낌없이 쓴다" 지갑여는 대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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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중국인은 실속을 챙기고 겉치레를 싫어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인의 소비습관에 대한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중산층에서 확산되는 소비심리는 이런 상식을 뒤엎는 경우가 많다.

최근 중국엔 고급 브랜드로 치장하고,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부(富)를 뽐내는 이른바 '과시형 소비'가 하나의 문화 현상처럼 번지고 있다.

"결혼식은 남들이 보통 하는 정도는 해야죠."

지난 9월 중순 상하이(上海)의 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한 산닝(單寧.26.여)은 당일 7만위안(약 1천1백20만원)을 썼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 결혼식은 보통 구청에 등기를 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피로연이 결혼식이다. 피로연은 신랑.신부가 호텔 문 앞에서 손님을 맞는 것으로 시작해 모든 손님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주는 것으로 끝나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만만치 않다.

피로연에는 4백여명의 손님이 몰렸다. 산닝은 10명이 앉는 한상에 12가지 음식을 장만하는 데 1천위안, 음료수까지 합쳐 1천2백위안이 들었다고 했다.

이밖에도 신랑 친구 회사에서 빌린 리무진에 꽃장식하는 데 2천5백위안, 이날 입은 신랑 양복이 6천위안, 신부가 옷 빌리고 화장하는 데 8천위안 등 부대 비용까지 합쳐 이 정도라는 것.

신부의 옷빌리는 값이 비싼 건 피로연 동안 신부가 옷을 세번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손님을 맞을 때는 웨딩드레스, 손님들에게 술을 따를 때는 붉은 색 중국드레스, 손님들을 배웅할 때는 서양식 드레스를 입는 게 기본이다.

국영기업 사무원인 산닝의 월급은 1천2백위안, 기술자로 일하는 신랑의 월급이 2천위안인 이들은 부부로 출발하는 첫날 저녁에 거의 2년치 연봉을 써버리고도 화려한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결혼식이 화려해지면서 손님들의 부조 수준도 덩달아 높아졌다.

학교 사무원으로 일하는 윈유즈(雲有智)는 "좀 친한 사람에게는 5백위안 이상은 부조를 해야 체면이 선다"며 "친구 결혼식이 있는 달은 돈에 쪼들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과시형 소비의 또 하나의 절정은 자녀에 대한 소비다.

중국의 '한 자녀 갖기'정책에 따라 '12개의 눈(친가.외가 조부모와 부모 등 6명)이 바라보는 한 아이'가 남에게 뒤지지 않는 소비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조부모와 부모가 재산을 털어붓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은행원인 胡모는 "어떨 때는 부모들끼리 누가 더 아이를 풍족하게 기르는 지 경쟁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런 소비 행태 때문에 중국 시장엔 세계에서 나온 거의 모든 브랜드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외제품은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속설도 낳고 있다.

상하이 고급백화점 둥팡상샤(東方商廈) 신자오후이(辛覺慧)매장 경리는 "소비자들이 옷을 사는 첫번째 기준은 브랜드"라고 말한다.' 고급 브랜드'로 소문만 나면 너도나도 그 브랜드에 몰려든다는 것이다.

가슴에 브랜드가 새겨지지 않은 양복의 경우 '피에르 카르댕'이라고 큼직하게 새겨진 상표를 소매에 그대로 달고 다닌다.

또 항저우(杭州)의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는 최근 일본산 시세이도 콤팩트를 가지고 다니는 게 유행이다.중국산보다 6배나 비싸지만 친구들끼리 '메이드 인 재팬'을 확인하기 때문에 꼭 일제를 구입한다는 것이다.

KOTRA 다롄(大連)무역관 주재원인 황재원씨는 "지난 봄 처음 선보인 보석 장식을 한 휴대폰이 최근 히트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다른 사람들과 좀더 차별화하려는 부유층들이 보석 휴대폰을 찾으면서 연말연시와 설날에 선물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푸저우(福州)대 자오바이후이(趙栢輝)교수는"돈을 많이 번 사람은 요즘 성공한 사람, 꿈을 이룬 사람 등으로 선망받고 존경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는 책무를 느낀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소비는 미덕'이라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중국인의 소비 수준은 계속 늘어 지난해 도시 주민의 소비는 1인당 7천위안으로 1995년 3천5백위안보다 5년 만에 두배로 늘었다. 또 돈을 빌려서라도 차와 집을 사겠다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과시욕에 편승한 마케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 애니콜이다.

원화로 환산해 70만~80만원대의 고가품만 중국 시장에 내놓았지만 그 덕에 이 휴대폰이 '신분의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품귀현상까지 빚고 있다.

4천~6천위안 짜리 양복을 파는 제일모직 갤럭시도 부유층이 많이 타는 비행기인 동방항공 기내지에만 광고하면서 '부유층만 상대하는 고가품'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며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상하이=양선희 기자

***자나깨나 '발재'

중국에서는 '8'이 행운의 숫자로 통한다. 중국 발음인 '파'가 돈을 번다는 뜻인 파차이(發財)와 비슷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결혼식 등에 부조할 때도 1백80위안.2백80위안 등 8자를 넣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경제 심장부인 푸둥(浦東)과 광저우(廣州)에서 가장 높은 빌딩도 88층이다.

중국은 문화혁명 등 혹독한 사회주의 개조과정을 거쳤지만 그 속에서도 돈을 신봉하는 의식은 결코 변색되지 않았다.

올 가을 상하이 한 신문 1면엔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중국에서도 알부자도 손꼽히는 원조우(溫州)인 1백20명이 집을 사러 상하이에 왔다가 마음에 드는 집이 없어 돌아갔다'.

원조우 주민들은 서슬퍼렇던 문혁 당시도 집집마다 단추나 가죽.액세서리 같은 각종 잡화를 만들어 몰래 내다 팔며 부를 축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문혁 4인방 중 하나인 장칭(江靑)이 "속까지 자본주의로 물든 자들을 보려면 원조우를 보라"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돈벌이에 열을 올린 결과 원조우인은 이제 서울과 맞먹는 집값을 자랑하는 상하이에 단체로 집을 사러 다니고, 웬만한 집은 성에 차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을 수 있게 됐다. 최근엔 중국식 자본주의 모범사례로 꼽혀 중국 각지에서 벤치마킹하는 대상도 됐다.

이뿐 아니다. 저장(浙江)성 남부 연안지역 농촌의 논에는 벼가 없다. 3모작을 할 수 있는 논에는 벼 대신 묘목이 즐비하다. 개발 붐이 일면서 나무 수요가 늘자 쌀보다 훨씬 돈이 되는 묘목을 택한 것이다.

농업용수로 쓰는 웅덩이들에는 담수 진주를 키우는 양식용 플라스틱 공이 떠 있기도 하다. 농업용수를 진주양식에 활용해 돈벌이에 나선 것이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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