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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검사의 길

3. 선배들과의 만남

사법대학원 수료후 3년 동안 해군 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1966년 늦가을 검사직을 지망했다.

판사냐 검사냐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검사직를 택했다.

내 성격이 소극적이어서 당사자들의 다툼에 균형감각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판사가 맞을 것 같아 처음에는 판사가 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격으로는 일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불편과 장애가 따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창조적.능동적인 검사가 되자고 마음을 정했다.

덕수궁 옆 옛 대검찰청 자리 빨간 벽돌집에 있던 법무부를 찾아가서 검사 지망원서를 냈다.

결국 그해 12월 1일 서울지검으로 발령을 받았다.권오병(權五柄)법무부장관으로부터 발령장을 받고 법무부에서 서울지검으로 전출되는 선배 검사들과 함께 서울지검으로 갔다.

내가 배치된 곳은 대법원 건물안에 있었던 서울지검 29호실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검사는 60명도 채 안돼 옛 대법원 건물 회의실 원탁에서 전체 검사회의가 가능할 정도였다. 현재 서울지검 검사가 1백80여명인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 있다.

서울지검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겉모습과는 달리 사무실은 늘 어두웠다. 좁은 방 하나를 검사 3명이 함께 사용한 탓에 입회서기와 조사 받으러 온 사람들로 검사실은 늘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 좋았다. 20대의 새내기 검사로서 사건처리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의문점을 같은 방 선배 검사나 경험 많은 입회서기들에게 물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같은 방에 있는 검사 가운데 가장 고참을 실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초임 때부터 인복이 있었는지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분들과의 좋은 인연은 훗날 내 검사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초임 검사 때 만난 실장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선배검사들은 백광현(白光鉉.전 내무부장관).배명인(裵命仁.전 법무부장관).김석휘(金錫輝.전 법무부장관)검사였다. 또 서울지검 검사직무대리 시절 이용훈(李龍薰.전 법무부차관.변호사)부장검사를 만나 엄격한 지도를 받은 것은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李부장은 내가 공소장이나 불기소장을 써 가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고 말한 뒤 빨간 펜으로 일일이 수정해 줬다. 李부장은 당시 서울지검 부장 6~7명 가운데 실력으로 보나 검사로서의 자세 면에서 보나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분이었다. 당시 선배들은 후배들이 무엇을 물으러 가면 반갑게 그리고 성심껏 지도해 줬다.

지금 얘기지만 당시 검사들은 검찰 실무에 대해 교본이 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실무상 어려운 점이 많았다.

내가 한번은 사건을 인지(認知)해 내 나름대로 인지보고서를 만들어 검사장께 결재를 올렸더니 이봉성(李鳳成.전 검찰총장.법무부장관.작고)검사장이 직접 만년필로 인지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준 일도 있었다.

나는 감찰부에 배치됐다. 부장은 서정각(徐廷覺.전 광주고검장.변호사)검사였다. 감찰부는 공무원 범죄를 담당하는 부서였고 서울시경과 노량진경찰서에서 송치한 사건도 처리했다.

감찰부에서 근무할 때 기억에 남는 일은 자동차 보험회사 직원들과 짜고 피해자에게 치료기간을 늘려 진단서를 발행한 의사 4명을 구속한 것이다.

원래 허위진단서 작성 죄는 의사들의 변명자료가 많은 데다 전문분야인 탓에 검사가 직접 범죄단서를 포착해 수사를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의사들이 피해자에게 발부한 진단서와 보험회사에 제출한 진단서의 치료기간이 다른 점에 착안, 이를 추궁한 끝에 혐의를 잡아낼 수 있었다.

초임검사로서는 성공적인 데뷔였다. 당시 많은 신문들이 수사결과를 보도하고 사설에도 다룰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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