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성선 '흔들림에 닿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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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이성선(1941~2000)'흔들림에 닿아'

떨어지다, 보이다, 남다, 흔들리다,닿다, 떨어지다, 열리다 -이 짧은 시에서 일곱 개나 되는 수동태의 연쇄, 그 끝에 문득 '껴안는다'는 능동적 행위로의 급전환. 그러나 그 껴안는 행동의 주체는 '빈 곳'. 나뭇가지.산.새.몸.잎… 모든 것이 흔들림의 연쇄에 의해 비워진 끝에 무한의 품에 안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비어 있음이 광채를 발하며 '있음'에 이른다. 지난해 어느날 돌연 우리들 곁을 떠난 시인은 무덤도 없는 먼지로 백담계곡의 일부가 되었다. 산에 절하던 시인, 이제 '무한 쪽으로' 열려 마침내 우주 안에 '있다'. 백지의 유서 같은 시.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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